기사입력 2001-11-01 오후 14:51:46

보건진료소 설치 20주년을 맞은 이 해, 지나온 세월을 회상하면서 오늘 또 한번의 하루를 맞이한다. 아침을 부르는 측백나무와 까치의 요란한 입맞춤에 자신을 추스려본다.

한때 "떠나자, 떠나자, 편리한 문명의 세상으로"를 반복하면서도 돌아보면 나를 기다리며 반기던 주민들 속에서 서로 행복하자 다짐하며 보내온 나날들.

주부의 집안일이 빛나지 않으면서 바쁘듯이 보건진료소의 하루가 그러하다. 독자적 운영이란 것이 얼마만큼의 인내와 희생을 요구하였는가? 하루가 밝으면 청소를 마치고 접수에서부터 가정기록부를 정리하고 주사처치, 투약, 가정방문, 예방접종, 진료비청구, 회계장부에 이르기까지….

40여가지의 일을 골고루 다하면서 주민에게 함부로 말하지는 않았나, ○○댁과 이웃에 소원하진 않았나, 고단하고 서운해도 풀잎처럼 옷자락 한번 털면 새롭게 단장하고 일어서야 하는 하루하루의 작은 긴장감이었다.

도시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공기 좋은 농어촌 시골에서 사니 좋겠다고. 더욱이 세상도 좋아져서 인터넷으로 정보제공도 되니 갈수록 멋진 생활을 영위할 수 있지 않느냐고. 그럴땐 "그럽시다. 제발 이곳에 와서 노인들과 함께 즐겁게 한번 살아봅시다"라고 큰소리로 말해주고 싶다.

짧디짧은 인생. 젊음을 이곳에서 보내고 불혹을 넘겨 이제 지천명이다. 하늘의 뜻을 알고 하늘에 생명을 맡기고 산다는 나이에서 아이들은 다 나가고 이곳 주민, 어르신들과 함께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여러가지 주어진 사회적 여건 때문에 힘들어하는 젊은 동료들의 마음을 어떻게 위로해주나. 나처럼 굳세기를 기도해줄 뿐이다. 가을 하늘은 높기만 한데 마을 학교들은 하나둘 폐교돼 버리고 해마다 열리는 운동회는 갈수록 초라해져도 우리는 수긍하면서 서로 다독이며 나날을 살아간다.

우리를 힘나게 하는 것은 도시로 간 주민의 자녀들이 가끔씩 전화를 해서 '부모님이 걱정돼도 보건진료소가 있어 든든하다'며 건네는 인사말이다. 지난밤 기어나온 지네에 물렸다며 찾아온 할머니께서 "소장 없었시모 우찌할뿐 했노" 하시며 안도하는 일이다.

캔디 소녀의 노래처럼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를 예전처럼 기쁘게 노래하련다. 주어진 일상을 중요하게 여기며 쉬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고 천천히 꿋꿋하게 나의 길을 걸어가야지. 마음 밝히며 나의 시집 '갯내음 버무린 진료소의 나날' 에 실린 애송시를 두드린다.

진료소에서 또 한번의 하루-

준비된 나만의 텃밭에 간다.
까치가 넉넉한 하루를 몰고
똑딱이는 시계를 바라볼 때
시선 멈춘 만남의 호미를 흔든다.

긴장된 공간을 메우며
산간수 잔물결로
밑바닥 스며든 촉촉함이기를
소홀하지 않고 무관심이 아니기를
호미자루 뒤축을 돌 가슴에 톡톡쳐서
단단히 조아잡고
기도하듯 부끄럽지 않게 흙을 잘게 부순다.

하나 둘 아픔 만난
돌멩이 솎아내면
밭이랑 얼룩 지우는 웃음이
강낭콩 풀빵처럼 부풀린다.

이내로운 스레트 지붕아래
영약한 일상의 램프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갯벌에서 채워진 것 토해내면
나도 그들처럼 진흙이 된다.

김연희  news@nurs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