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2-07-25 오전 09:42:22

　※ 이 글은 지난 6월 19일 타계한 밀드레드 루카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홍옥순 여사가 보내온 것입니다. 밀드레드는 1945∼1947년 미군정청 보건후생부 간호사업국의 초대 수석고문을 맡아 우리나라 간호발전과 국민 보건향상을 위해 헌신한 분입니다. 홍옥순 여사(85세·사진)는 대한간호협회 회장을 지낸 한국 간호계의 대원로로 미국 뉴욕에 살고 계십니다.

　밀드레드 루카 대위를 알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미군정청 간호고문단의 일원으로 1945년 9월 하순 서울에 왔다. 내 생전 처음 보는 여자군인을 호기심으로 대했다. 마침 그는 언어소통이 잘되지 않는 한국 남학생들 틈에 쌓여 손짓 발짓으로 길을 묻고 있었다. 그는 나의 모교인 연대 간호대학을 시찰하러 나선 길이었다. 내가 동행을 자청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키나 몸집이 나에 비해 별 차이가 없었고, 처음 만난 사람치곤 친근감이 느껴져 나는 기꺼이 그를 돕게 됐다. 곧 오래된 친구처럼 가까이 느껴졌고, 그가 품은 이상과 뜻은 내게 그를 더욱 깊게 알고싶은 생각을 갖게 했다. 헤어지기 전 그는 함께 일할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바로 다음날 미군정청 보건후생부 장관을 방문했고, 인정을 받아 간호사업국에서 일하게 됐다. 밀드레드는 간호사업국의 수석고문을 맡고 있었다.

　그는 항상 친절과 감탄으로, 웃음 띤 얼굴로 모든 사람들을 대했다. 전국의 보건상태를 파악하고 특히 간호와 조산 전문인력의 교육실태 등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현지방문을 할 때는 험한 길을 지프를 타고 가면서도, 불편한 숙소에도 아랑곳 않고 오로지 기쁨으로 흥분된 상태를 숨기지 못했고 항상 기록과 그림으로 실태를 묘사해 가며 설명했다. 언제나 호기심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으로 우리의 형편과 문화, 습관 등을 받아들였고 면밀하게 기록했다.

　일본 치하의 오랜 세월을 벗어난 우리들은 전후 빈곤과 병마에 시달렸고 비참했다. 밀드레드는 이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아주 친절했고 간호와 조산사업의 양과 질을 향상시켜 어서 빨리 한국 사회를 도울 수 있게 할 것을 다짐했다. 한국에 간호사와 조산사 교육제도, 면허제도를 뿌리내리게 한 시발점이 바로 밀드레드였음을 나는 굳게 믿는다.

　밀드레드는 총명했고 매사에 침착했으며 늘 존경심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그는 조직적이면서 진취성을 발휘하는데 용감했다. 1946년 초 소록도 갱생원과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에는 험한 여행길에 피곤해진 몸을 쉴 틈도 없이 상세히 기록하면서 개선방향과 새로운 계획을 항상 연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귀국하기 전 전국 간호사·조산사의 교육과 실무, 면허제도 등을 표준화시키고, 중앙관리체계를 마련하는데 큰 공적을 세웠다.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947년 소령으로 승진됐다.

　또한 1946년 한국인 간호사만으로 구성된 조선간호협회(현 대한간호협회)가 출범할 수 있도록 지지했으며, 이후 국제간호협의회 정식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도록 도운 일도 잊을 수 없다.

　그는 미국에 돌아가서도 변함없이 한국과 한국인, 한국 문화와 관습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다른 외국인들에게 알리려고 애썼다. 항상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인을 존경으로 대했다.

　그가 살던 콜로라도 덴버 근처에 한국인, 특히 한국 간호사가 유학을 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급히 연락해 편의를 제공했다. 한국인의 딸이 미국에서 결혼을 하게 되자 솔선해 결혼식과 피로연을 도와주었다는 이야기, 한 유학생을 위해 공항까지 마중을 나오고 자신의 손목시계를 풀어 건네주었다는 일화가 잊혀지지 않는다. 미군에서 은퇴한 후 1955년부터 1970년 사이에는 전적으로 한인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한인노인회에도 참석해 격려하고 도움을 주었다.

　밀드레드는 한국과 한국인의 복지와 평화를 가장 원했고 기회가 있는대로 이를 지지하고 격려하고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1945년 서울에서의 첫 만남 이후 그가 타계하기 직전까지 편지를 교환하고 서로 방문하는 등 특별한 사랑과 친분을 나누었다. 그 만남을 얼마나 감사해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그는 항상 우리들 곁에 있고 또 친절한 마음으로 우리를 계속 격려하고 지지할 것으로 믿는다.

　그는 6월 19일 딸 샤론 곁에서 행복하게 눈을 감았다. 이제 그는 영원한 평화와 평안함을 누리리.

뉴욕에서 홍옥순

홍옥순  news@nurs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