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이슈/기획
제26회 간호문학상 수필부문 당선작"공짜전화"
공짜전화
기사입력 2006-01-05 오전 10:19:01
점심 먹었어?
“뭐해? 바빠?”
“쫑(우리집 강아지)은 잘 있어?”
“아픈 데는 없고?”
사정 모르는 이가 들으면 수신자를 친한 친구쯤으로 생각할 것이나 나의 이런 반말을 티끌만큼의 불편함 없이 그러려니 하고 들어주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우리 아빠다.
아빠는 점심 후에 마시는 달착지근한 한 잔의 커피보다는 큰딸로부터의 전화 한 통화를 무척 좋아 하신다. 비록 내가 묻는 말에 당신은 똑같은 단답형 대답의 연속일지라도 아빠는 그 짧은 통화를 가슴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일이 힘들 때마다 한 번씩 꺼내 웃음 짓는다. 매일 똑같은 질문과 대답의 반복이고 내 주머니에서 동전이 나가는 전화가 아니라 점심시간에 병원 안내 데스크에서의 공짜전화를 이용한 통화라 할지라도 상관없는 모양이다.
전화선 너머 저편에서 들려오는 아빠의 음성은 반가움이 묻어난다. 그리고 나를 걱정하는 부정(父情) 또한 전해져 오니 통화후에 코끝이 시큰거림은 어쩔수 없으나 이젠 으레 맛난 점심식사후 아빠에게 하는 통화가 내 오후 스케줄의 시작이다.
사실 아빠는 얼마전까지 남들 다 있다는 핸드폰이 없었다. 선물해 드리고 싶은 마음은 여러해 전부터 있었으나 그 값이 만만치 않아 차일피일 미루어 왔던 터이다. 그런데 얼마전 내가 집을 떠나 생활하게 되면서 새삼 아빠에 대한 측은함, 안타까움, 고마움이 가을 단풍 붉어지듯 더 진해져 아빠생신에 큰맘 먹고 준비한 것이었다. 여기저기 굳은살이 자리 잡은 당신 손의 반도 안 되는 핸드폰을 받던 날, 차마 아이처럼 대놓고 좋아할 수 없었으나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안면으로 퍼지는 당신의 웃음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아빠는 시골 큰 대문 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운 농촌 살림이었으나 흰쌀을 곡간 천장까지 쌓아두고 살았단다. 동네사람들이 보리밥 먹을 때 그 사람들 보기 미안해 차마 쌀밥은 못 먹고 흰쌀에 보리를 약간씩 섞어 먹었다고 한다. 인물 좋고 너스레 좋은 아빠는 부잣집 막내아들, 소위 잘나가는 사람이었단다. 근데 막상 결혼이라는 것을 하고 보니 부잣집 도련님은 생활이라는 현실에 있어선 도통 잘 나갈 수가 없었다.
내가 아빠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 훌쩍 컸을 때 그 시절을 생각하며 `나는 결혼만 하면 부모님이 다 먹여 살려줄 줄 알았다'며 당신의 철없었음을 조용히 고백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믿었던 사람들에게 속아 배신당하고 돈까지 떼인 어느 가을 해가 뉘엿거리는 서쪽하늘을 한참동안을 바라보다가 소중히 여기던 당신의 성경책을 불살라 버렸다.
잘나가던 삶에 태클이 들어오고 세 마리나 되는 애들은 병아리처럼 삐약삐약 거리고 돈 들어갈 구멍은 많은데 나올 구멍은 없고 암담했단다. 그래서 장날이면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에 술을 마시고 급기야는 술이 사람을 먹어버려 시린속, 쓰린속, 썩어드는 속에 울분을 담아 등 돌린 세상을 향해 피토하듯 `돈아! 돈아' 악쓰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아빠의 방황은 1~2년이 아니었다. 소처럼 큰 눈에 담았던 순한 빛이 독사처럼 변하고 본래의 소 눈빛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그 시간들… 당신 자신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켜봤어야할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지…
나는 커가며 참 많이도 울었다. 내 아빠가 우는 현실이 그리고 그의 딸로 태어났음이 참으로 서글펐다. 먹고 입을 것에 대한 풍족함을 바라기 보다는 아빠라는 든든한 울타리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기도했었다. 푸른 대나무 순 같던 여린 내 마음엔 사계절 내내 시린 칼바람이 불었다. 시리고 시렸다.
아빠의 딸로서 아빠를 애잔하게 여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난 화가 났고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당신의 무능함에 불만을 품으며 한마디 한마디에 토를 달아 못마땅히 여기고 칼날을 세워 달려들 듯 위태로운 딸을 바라보는 당신의 심정은 또한 얼마나 힘들었을지… 어쨌든 난 내 마음의 짐들이 하루하루 가슴에 어깨에 큰 바위가 되어 쌓여감에 따라 부쩍 말수도 줄어들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으며 가슴을 펼 수가 없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나는 아빠가 엄마를 만나 결혼했다던 스물일곱이 되었고 아빠에 대한 내 감정들도 차츰 희석되어갔다.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사가 됐으며 중환자실 1년, 정신과 2년이란 경력을 갖게 되었다.
어느 때부터였을까? 한 십년쯤 되었을까? 아빠는 새벽 다섯시 삼십분이면 눈이 오던 태풍이 불던 천둥이 치던 간에 어김없이 일터로 나갔고 꼭 출근 한 시간 뒤인 여섯시 삼십분만 되면 집에 전화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뭔가 특별한 용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확인할 내용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나 매일매일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처음엔 급한 전화라는 생각에 신호음이 들리자마자 뛰어가 받았으나 몇 번 지나지 않아 내용도 없는 통화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목록
“뭐해? 바빠?”
“쫑(우리집 강아지)은 잘 있어?”
“아픈 데는 없고?”
사정 모르는 이가 들으면 수신자를 친한 친구쯤으로 생각할 것이나 나의 이런 반말을 티끌만큼의 불편함 없이 그러려니 하고 들어주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우리 아빠다.
아빠는 점심 후에 마시는 달착지근한 한 잔의 커피보다는 큰딸로부터의 전화 한 통화를 무척 좋아 하신다. 비록 내가 묻는 말에 당신은 똑같은 단답형 대답의 연속일지라도 아빠는 그 짧은 통화를 가슴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일이 힘들 때마다 한 번씩 꺼내 웃음 짓는다. 매일 똑같은 질문과 대답의 반복이고 내 주머니에서 동전이 나가는 전화가 아니라 점심시간에 병원 안내 데스크에서의 공짜전화를 이용한 통화라 할지라도 상관없는 모양이다.
전화선 너머 저편에서 들려오는 아빠의 음성은 반가움이 묻어난다. 그리고 나를 걱정하는 부정(父情) 또한 전해져 오니 통화후에 코끝이 시큰거림은 어쩔수 없으나 이젠 으레 맛난 점심식사후 아빠에게 하는 통화가 내 오후 스케줄의 시작이다.
사실 아빠는 얼마전까지 남들 다 있다는 핸드폰이 없었다. 선물해 드리고 싶은 마음은 여러해 전부터 있었으나 그 값이 만만치 않아 차일피일 미루어 왔던 터이다. 그런데 얼마전 내가 집을 떠나 생활하게 되면서 새삼 아빠에 대한 측은함, 안타까움, 고마움이 가을 단풍 붉어지듯 더 진해져 아빠생신에 큰맘 먹고 준비한 것이었다. 여기저기 굳은살이 자리 잡은 당신 손의 반도 안 되는 핸드폰을 받던 날, 차마 아이처럼 대놓고 좋아할 수 없었으나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안면으로 퍼지는 당신의 웃음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아빠는 시골 큰 대문 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운 농촌 살림이었으나 흰쌀을 곡간 천장까지 쌓아두고 살았단다. 동네사람들이 보리밥 먹을 때 그 사람들 보기 미안해 차마 쌀밥은 못 먹고 흰쌀에 보리를 약간씩 섞어 먹었다고 한다. 인물 좋고 너스레 좋은 아빠는 부잣집 막내아들, 소위 잘나가는 사람이었단다. 근데 막상 결혼이라는 것을 하고 보니 부잣집 도련님은 생활이라는 현실에 있어선 도통 잘 나갈 수가 없었다.
내가 아빠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 훌쩍 컸을 때 그 시절을 생각하며 `나는 결혼만 하면 부모님이 다 먹여 살려줄 줄 알았다'며 당신의 철없었음을 조용히 고백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믿었던 사람들에게 속아 배신당하고 돈까지 떼인 어느 가을 해가 뉘엿거리는 서쪽하늘을 한참동안을 바라보다가 소중히 여기던 당신의 성경책을 불살라 버렸다.
잘나가던 삶에 태클이 들어오고 세 마리나 되는 애들은 병아리처럼 삐약삐약 거리고 돈 들어갈 구멍은 많은데 나올 구멍은 없고 암담했단다. 그래서 장날이면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에 술을 마시고 급기야는 술이 사람을 먹어버려 시린속, 쓰린속, 썩어드는 속에 울분을 담아 등 돌린 세상을 향해 피토하듯 `돈아! 돈아' 악쓰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아빠의 방황은 1~2년이 아니었다. 소처럼 큰 눈에 담았던 순한 빛이 독사처럼 변하고 본래의 소 눈빛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그 시간들… 당신 자신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켜봤어야할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지…
나는 커가며 참 많이도 울었다. 내 아빠가 우는 현실이 그리고 그의 딸로 태어났음이 참으로 서글펐다. 먹고 입을 것에 대한 풍족함을 바라기 보다는 아빠라는 든든한 울타리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기도했었다. 푸른 대나무 순 같던 여린 내 마음엔 사계절 내내 시린 칼바람이 불었다. 시리고 시렸다.
아빠의 딸로서 아빠를 애잔하게 여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난 화가 났고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당신의 무능함에 불만을 품으며 한마디 한마디에 토를 달아 못마땅히 여기고 칼날을 세워 달려들 듯 위태로운 딸을 바라보는 당신의 심정은 또한 얼마나 힘들었을지… 어쨌든 난 내 마음의 짐들이 하루하루 가슴에 어깨에 큰 바위가 되어 쌓여감에 따라 부쩍 말수도 줄어들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으며 가슴을 펼 수가 없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나는 아빠가 엄마를 만나 결혼했다던 스물일곱이 되었고 아빠에 대한 내 감정들도 차츰 희석되어갔다.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사가 됐으며 중환자실 1년, 정신과 2년이란 경력을 갖게 되었다.
어느 때부터였을까? 한 십년쯤 되었을까? 아빠는 새벽 다섯시 삼십분이면 눈이 오던 태풍이 불던 천둥이 치던 간에 어김없이 일터로 나갔고 꼭 출근 한 시간 뒤인 여섯시 삼십분만 되면 집에 전화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뭔가 특별한 용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확인할 내용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나 매일매일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처음엔 급한 전화라는 생각에 신호음이 들리자마자 뛰어가 받았으나 몇 번 지나지 않아 내용도 없는 통화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편집부 news@nurs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