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6-11-23 오전 10:19:05

　영국의 유명한 작가이자 철학자인 아이리스 머독(1919～1999)은 70세를 넘기면서 치매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학문적 열정과 시대를 뛰어넘는 자유로운 사고의 소유자인 아이리스는 갑자기 영국 총리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거나 TV 인터뷰 도중 말문이 막힐 때조차도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며 오히려 화를 냈다. 그러나 능숙하던 글 쓰는 일이 힘들게 느껴지면서 스스로 인지기능이 떨어짐을 알아차리고는 우울증을 보이게 된다. 치매가 진행될수록 우편배달부나 절친한 친구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길을 잃고 헤매는 일도 허다하다. 또 남편의 운전대를 휘어잡는가 하면 차문을 열고 밖으로 떨어져나가기도 했는데, 실제로 치매로 인한 사망은 망상이나 환시, 배회, 돌발적 행동으로 인한 교통사고나 추락 등이 원인이다.

　치매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발생 빈도가 높아지는 것으로 고령화사회로 접어들면서 유병율도 증가해 65세 이상 인구 10%이상이 치매를 앓고 있다. 치매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 미국에서는 우리나라 1년 예산보다 많은 돈을 연구에 투자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완전한 치료제를 개발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치매가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모두를 힘들게 하는 무서운 병이기 때문이다. 치료제뿐 아니라 예방에 대한 연구에도 박차를 가해야하겠다.

　아이리스를 돌보는 남편 존이 `마치 암흑 속을 항해하는 기분'이라고 하는 것처럼 치매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이다. 그러나 철저히 파괴되어 가는 아이리스를 끝까지 보살피는 존을 보노라면, 같은 과거를 공유해온 부부만이 누릴 수 있는 지고지순한 사랑가를 듣는 듯하다. 존은 아이리스와 사랑의 눈빛을 나누었던 찰나의 순간조차도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느새 올해도 한 장의 달력만을 남겨놓았다. 한해를 마감하면서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을 노트한다.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 그리고 내게 소중한 사람들. 기억의 소멸이 곧 사랑의 소멸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진아(인제대 간호학과 조교수)

오진아  news@nurs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