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 옥성득 미국 UCLA 한국기독교 부교수(아시아언어문화학과 임동순임미자 석좌)
◇ 명성황후 시의로 궁중 출입하며 총애 받아
◇ 동서양의 만남과 한미 교류의 문을 열다
◇ 제중원에서 일반 부녀자들 진료와 간호에 헌신
◇ 한국인의 겸손·수준 높은 문화 사랑하고 존경
한국에서 활동한 첫 졸업간호원은 1886년 7월 제중원에 부임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엘러스(Annie J. Ellers, 1862∼1938)였다. 그녀는 1884년 보스턴시립병원 간호원양성학교를 졸업한 후, 보스턴대학교 의과대학에 다니던 중, 1885년 4월에 개원한 제중원의 부녀과 담당 여의사와 왕비의 주치의가 필요하다는 알렌 의사와 엘린우드 선교부 총무의 부탁을 받고 2년만 일할 생각으로 내한했다. 그러나 민비와의 만남은 엘러스의 생애를 바꾸었다.
알렌은 고종과 민비에게 편의상 엘러스를 의사로 소개했다. 엘러스는 의사 호칭이 불편했지만, 의대 2년 과정을 마쳤고, 알렌과 헤론의 지도하에 실습을 하고 있어서 이를 수용했다. 엘러스는 8월부터 민비를 진료하기 시작했는데 첫 보름 동안 여섯 번 왕진했다. 9월에 왕비의 병세가 악화되었지만, 당시 남자 의사가 왕비를 진찰하려면 손목에 실을 감아 병풍 뒤에서 진맥하던 시절이라, 알렌도 어쩔 수 없었다. 엘러스가 왕비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진찰했고, 이에 알렌이 처방할 수 있었다.
정부는 10월 25일 엘러스에게 교지 `美女醫師 阿羅氏 奉貞夫人者'를 내리고 정2품 관직에 봉했다. 여기서 여의사는 기존 의녀제도에 근거한 새 호칭이었다. 이는 미국인 간호원을 왕비의 시의로 임명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내의원 의녀는 왕실 부녀자를 진료하고, 궐 밖의 혜민서 의녀는 일반 부녀자 진료를 담당했다. 내의원에는 행수의녀 1인 아래 차비대령의녀 10인, 내의녀 12인이 있었고, 혜민서에는 내의녀 2인 아래 간병의 20인과 초학의 50인 정도가 있었다.
제중원이 구리개로 이전하자 엘러스는 1886년 11월부터 일반 부녀자 진료를 시작했고, 알렌과 헤론이 수술할 때 간호원으로 보조했다. 이는 혜민서의 내의녀의 역할과 유사했다. 동시에 엘러스는 민비의 시의로 궁중을 출입했는데, 이는 1895년 10월 민비가 시해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민비는 엘러스를 통해 서구 문명을 이해했고 자주 대화하며 총애했다. 고종과 왕세자(순종)도 엘러스와 친해지면서 영어로 인사를 나누었다. 엘러스는 겨울에 향원정 연못에서 피겨 스케이팅을 시연했다. 이듬해 7월 엘러스가 벙커 목사와 결혼하자 민비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입궐하라고 명하여 꼼꼼하게 살펴보았고, 일주일 후 다시 불러 세자비의 혼례복을 살펴보도록 배려했다. 혼례식을 동서양 복식 비교의 기회로 삼은 것이었다.
또한 궁중 연회의 학춤 공연에 초청했는데, 엘러스는 연꽃 봉오리 속에서 소년 소녀가 나오는 학춤에 경탄했다. 엘러스와 민비는 동서양 만남과 한미 교류의 문을 열었다.
엘러스는 누구보다도 민비를 가까이에서 잘 알고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가 본 민비는 유능하고 확고한 의견을 가진 기개 있는 여걸인 동시에 어머니처럼 자애롭고 고결한 심미안을 갖춘 여성이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엘러스는 애통해 하며 인산 행렬에 참여하고 안장을 지켜보았다.
엘러스는 1887년 6월에 여학당(정신여학교)을 시작했고, 1888년 3월에 호튼 의사(언더우드 부인)에게 제중원 부녀과를 인계했다. 엘러스는 40년간 선교사로 봉사한 후 1926년 은퇴하고 캘리포니아에 거주했다. 1937년 한국에 돌아와 이듬해 8월에 죽어 양화진 남편 묘 옆에 합장되었다. “하나님을 믿자, 바르게 살자, 이웃을 사랑하자.” 그녀의 묘비명이다.
처음 한국에 올 때 엘러스는 한국인이 우상을 숭배하는 무지한 이방인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고대 문명, 높은 문화 수준, 예술적 역량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을 배우고, 한국인의 겸손하고 절제하는 고상한 성품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무지를 부끄러워하고 한국인을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비천한 여종부터 왕비의 옥체까지 간호하고 치료한 한국의 첫 간호원 엘러스는 의료인, 교육인, 전도인의 삶을 산 한국의 첫 근대 여성이었다.
※ 이 글에서는 간호사 명칭을 근대에서 활동했던 당시 그들을 부르던 간호원으로 통일해 서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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