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3-10-30 오전 08:26:08

정헌재(존스홉킨스 보건대학원 박사후연구원 / 환자안전연구회 국제협력이사)

◇환자 접점에서 오류 걸러내는 역할
◇존스홉킨스 병원의 환자안전 첫 마디, “간호사 의견이 잘 받아들여지고 있나요?”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내고 계실 고국의 간호사 선생님들께.

올해 10월은 존스홉킨스 병원에서 매 18개월마다 실시하는 환자안전문화 설문조사의 달입니다. 의사, 간호사는 물론 병원 장비를 옮겨주는 분들까지 모두가 참여하게 되는 이 설문조사지의 첫 문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이 일하는 구역에서 간호사의 의견이 잘 받아들여지고 있습니까?”

세계 최고라는 존스홉킨스 병원에서 실시하는 안전에 대한 전 직원 설문조사의 첫 단어가 바로 `간호사'라는 점은, 어쩌면 환자안전에 관해 간호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나타내주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러면 간호사는 왜 그렇게 중요하고, 또 어떤 방법으로 안전에 기여하게 될까요?

환자에게 약을 주는 과정을 생각해 봅시다. 의사가 처방을 내리고 그것이 약제과에 전달되어 조제가 완료되면, 각 병동에 옮겨지고 간호사 선생님들을 통해 환자들에게 투약됩니다.

요즘은 찾기 힘들지만 처방을 손글씨로 쓰던 시절, 사뭇 알아보기 힘든 그 글씨들을 시스템에 입력하던 것은 간호사였고(적어도 미국에선), 말로 내린 오더(버발 오더)를 기록하는 것도 간호사의 업무였습니다. 약제과에서 올라온 약이 환자에게 맞는 제대로 된 것인지를 투약기록지를 작성하며 확인하는 것도 간호사의 일입니다.

이렇듯 현대적 환자안전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 즉 어디선가 발생했을 수도 있는 오류를 발견하여 교정하는 일을 수행하는 존재가 바로 간호사인 것이죠.

그런데 반대로 간호사가 행하는 일들은 그 대상이 곧바로 환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투약을 하러 병실에 들어갔다가 다른 환자에게 약을 주면, 그것을 교정해 줄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병원에서 간호사란, 의료서비스가 환자에게 전해지는 바로 그 접점에서 일하며, 혹시라도 발생했을지 모를 오류들을 걸러낼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지만, 간호사 스스로에게서 발생했을지도 모를 오류를 걸러줄, 즉 나의 뒤를 받쳐주는 누군가는 존재하지 않는 외로운 자리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실제 일을 하는 상황에서는 그런 중요한 역할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때론 말도 안되는 업무량에 치이기도 하고, 종종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는 상황을 견디도록 요구받기도 합니다.

환자에게 약을 줄 때 이름을 확인하려 하면 “왜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모르냐”며 타박 받은 일 한두 번 씩은 다 당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더구나 기본적으로 안전이란 것은 잘못되는 상황을 방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 열심히 안전을 지켜내더라도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뿐'이니, 잘했다는 칭찬을 받는 일도 드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어려움에도, 어쩌면 보답 없이 노력만을 요구받는 상황을 모두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러분께 여러분의 환자를 지켜달라는 부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알코올성 세정제로 너무 자주 씻은 탓에 손이 다 거칠어져 버렸을 걸 잘 알지만, 그래도 매 번 환자를 볼 때마다 손을 씻자는 말씀을 드려야 하고, 다 지키기엔 버거울 만큼의 체크리스트들이 주어지는 것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을 지켜달라 부탁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환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안전을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무너지면 환자들을 지켜줄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료인입니다. 환자가 잘 치료받고 건강해지는 모습을 보며 '행복'을 느끼는 게 바로 우리이고, 그 모습에서 고단한 일상을 견뎌낼 힘을 얻는, 기운을 차리는 게 바로 우리라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참 멋진 일 아닐까요? 무척이나 이기적으로 생각해서 '내가 행복한 게 제일 중요해!'라고 마음을 먹더라도, 결국 내가 행복해지는 과정에서 아픈 환자들이 다시 건강을 되찾는 것이라는 점 말입니다.

그리고 환자들이 그렇게 아무 일 없이 '안전하게' 치료받을 수 있게 해주는 존재가, 여러분이 일하시는 곳에서 생길지도 모를 온갖 위험한 상황들에서 환자를 지켜주는 가장 소중한 존재가 바로 여러분, 간호사 선생님들이신 것이고요.

그렇게 우리의 환자를 지켜달라는 부탁과 격려, 그리고 존경의 마음을 담아 바다 건너에서 이렇게 편지를 띄웁니다.

존스홉킨스 병원이 내려다보이는 볼티모어의 연구실에서 정헌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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