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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회 간호문학상 수기 가작
기사입력 2016-12-16 오전 10:23:51

메르스가 우리에게 남긴 건 상처만은 아닙니다

윤혜진(강동경희대병원)

 

나에게 메르스(MERS)는 그저 뉴스의 단편일 뿐이었다. 중동에서 낙타유를 먹고 감염이 되었다는데 내가 동물원으로 찾아 가지 않고서야 낙타를 볼 수나 있겠나? 그런데 뭔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첫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소식과 함께 감염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더군다나 감염자들 모두가 병원 내 감염이라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 어느 병원인지도 알 수 없어서 불안감은 증폭됐다. ‘경기도 어느 병원이라더라’, ‘어디 사는 누가 확진을 받았는데 동네를 쏘다니며 바이러스를 퍼뜨린다더라’ ‘초등학생도 감염됐으니 학교에 퍼지는 건 시간문제다.’ 이런 거짓도 진실도 아닌 말들이 SNS를 뒤덮었다.

내가 근무하는 병원에도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해졌고, 무서운 기세로 감염자가 늘더니 설상가상으로 우리병원에 감염자가 다녀갔다는 뉴스가 나왔다. 나와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생각한 나는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았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출근했지만 병원은 예상과 달리 차분한 분위기였다. 이동경로를 따라 방역을 마쳤고 추가 감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으니 직원들은 동요하지 말고 각자의 업무에 충실하면 된다고 했다.

병원에는 입원을 취소한다거나 진료예약을 변경하고 싶다는 연락이 많았고, 병원에 와도 괜찮겠느냐는 확인전화가 꼬리를 물었다. 정상적으로 진료를 하고 있다고 말하는 내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얘기는 안전에 대한 의심과 책임질 수 있느냐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뿐이었다. 더러는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마치 나와 병원을 거대한 바이러스 취급하듯 했다.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저 일부 사람들의 편협한 생각일 뿐이라고 넘기면 됐으니까. 하지만 정작 우리를 흔드는 건 다른 일들이었다.

동료간호사가 아침 출근길에 아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어제 뉴스에 어머니 병원이 나오던데, 오늘 아이들이 학교를 쉬었으면 좋겠어요” 라고 말이다. 본인은 그 시각 그 장소에 없었노라고 설명했지만 선생님은 무척 난감해하더란다. 뉴스에까지 나온 이상 다른 아이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단다. 부당하다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단다. “선생님, 제가 지금 출근 중이라서, 예~ 어~ 아이들이 있을 곳도 마땅치 않은데, 저한테 좀 시간을 주실 수 있을까요?” 횡설수설 하며 그 말을 거둬주길 바랄 뿐이었다고. 결국 등교는 할 수 있었지만 이만저만 맘이 상한 것이 아니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우리도 다 같이 울컥했다. 결코 남 일이 아니었다. 곧 내게 걸려올 전화였고 우리 아이들이 겪을 일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날이 갈수록 상황은 나빠졌다. 전화통은 연신 불이 나고 병원 문을 닫으라는 소리도 여러 번 들어야 했다. 파김치가 되어 귀가하면 온종일 엄마를 기다렸던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달려 나왔지만, 안아주기보다는 엄마 씻기 전에는 손도 대지 말라는 경고가 먼저였다. 내 스스로도 어딘가 바이러스가 묻어 있지는 않을까 과민하게 불안해했다.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도 소음으로 들렸고, 가족들과 대화할 기운조차 없었다. 병원 근처에서는 직원들이 함께 걷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사람들은 마치 죄인이라도 된 양 병원에서 나오는 우리를 힐끗거렸고 단골식당에서는 저녁을 먹으려고 한 직원들에게 입장거부를 하기도 했다.

결국 아들이 다니던 초등학교가 휴교를 결정했다. 아이들을 보호하겠다는 취지였겠지만 우리 아이는 보호자도 없이 혼자 덩그러니 빈집을 지켜야했다.

“혼자 있을 수 있지? 몇 시간만 있으면 아빠가 오실거야. 무서우면 TV 보고 있어. 집 밖엔 나가지마. 친구들이랑도 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도시락 싸 놓을테니까 점심 챙겨먹고…….”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 아이한테 아침마다 내 입은 쉴 새 없이 주의사항을 일러주고 있었다. 별일 아니라고 아이를 안심시키기는커녕 그저 하루를 잘 버텨내주길 바라며 주문 외우듯 행동강령이나 일러주다니. 엄마가 간호사라서 너무 좋다고 자랑하던 아들에게 난 부끄럽게도 엄마가 병원에 다닌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이 알면 불편할 수도 있다고 말하며 입단속을 시키고 돌아서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는 상처받았고, 지쳐있었다. 모든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정말 따뜻한 위로가 절실한 때였지만 우리에게는 서로를 보듬을 여유조차 없었다.

2주만 잘 버티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기대했건만, 추가 감염자가 발생하고 설상가상으로 인공신장실을 격리해야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병원은 휴업을 선언했다. 투석환자들은 입원 격리를, 입원 중인 환자들은 모두 퇴원조치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 전개에 모두들 당황했다.

입원 병동은 병동대로 급하게 퇴원절차를 진행했고, 퇴원이 불가능한 환자들은 잔류병동으로 옮겨야했으며, 10층 병동을 시작으로 자가격리자들의 입원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1인 1실이 원칙이니 병동 하나로는 어림없었다. 빨리 다른 병동이 준비돼야 했다. 근무시간이 끝났다고 퇴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격리실 준비를 위해 다인실의 침대를 빼고, 침구를 정리하고, 격리물품을 채우고, 커튼을 떼어내는 아주 사소한 작업부터 인공신장실과의 동선을 고려해서 병실 배정이나 환자 상태에 따른 기구까지 다 간호사 할 몫이었다.

외래는 외래대로 당장 오늘의 예약자들에게 전화를 해야 했다. 병원의 한시적 휴업을 알리고 환자들의 상태는 어떠한지, 예약을 미뤄도 되는 것인지를 일일이 확인하고 약이 떨어진 분들은 해결책도 찾아줘야 했다. 토요일과 일요일 휴일도 반납한 채 전화를 돌렸지만 하루에 통화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고작 20명 내외였다. 목소리도 갈라지고 귀에서는 이명이 들릴 지경이었다. 입술이 다 터졌지만 그냥 집에 갈 수가 없었다. 연락이 닿지 않는 분들 때문에 몹시 불안했다. 혹시라도 내일 병원을 찾아오는 분들이 있어서는 안되는데, 다른 병원에서 처방을 거부해서 곤란을 겪지는 않을지. 혹여 응급상황에 갈 곳을 정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게 되는 건 아닌지. 이런 상황이 모두 내 탓인 듯, 우리 탓인 듯 했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환자분들에게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나는 나대로, 가족들은 가족들대로 상황은 점점 더 꼬여만 갔다. 남편의 회사에서는 일괄적으로 의료인 가족 실태조사를 한다더니 남편에게 재택근무를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학교에서도 의료종사자들의 자진 신고를 독려하는 글들이 날아왔다. 결국 내가 병동과 투석실로 파견근무를 하게 되자 겨우 휴교를 끝내고 재등교한 아이들을 나는 시골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우리병원 간호사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억울했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예상됐던 일인지도 모르겠다. 원래 밖에서 보는 것이 더 공포스러운 법이니까.

격리실 업무를 두고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사직 의사도 표했다. 갓 돌 지난 아기가 있다고, 아이 때문에라도 자기는 더 이상 못하겠다고 말이다. 응급실에 있다가 자가 격리에 들어갔던 간호사는 또다시 인공신장실에 가야한다는 말에 더없이 막막한 표정이었다. 더 이상은 싫다고 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다고 했다.

여기서 그만두면 문제를 끝낼 수 있다. 병원 근처에 안가면 된다. 그럼 나도 저 병원 밖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다. 여기서 사명감 운운하며 목을 조일 필요가 없다. 술렁이기 시작했다. 감정을 억누르고 표현하지 못했던 그 이야기를 누군가가 꺼낸 것이다. 나라고 그 맘을 왜 모를까? 이기적이지 않느냐고 누가 감히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다들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어디로 흘러가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이 막막한 현실을 얼마나 견뎌낼 수 있을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여기 남아 있는 것은 거창한 인류애나 나이팅게일 정신 때문이 아니다. 그냥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라고 생각해서이다. 스스로를 사명감이 투철하다든가 직업의식이 뛰어난 간호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그저 주어진 일을 하는 보통사람이다. 남아서 나의 일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 나다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만두겠다고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용기가 없어서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다.

인공신장실 파견근무는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찌는 듯한 더위에 숨도 잘 쉬어지지 않는 마스크와 고글, 온 몸을 휘감는 방호복.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 오듯 해서 방호복이 팔다리에 들러붙고, 두 개씩 신은 버선은 묶어도 자꾸만 흘러내려 발에 거치적거렸다. 실질적인 업무를 돕지는 못하고 기본적인 간호와 객담검사를 위해 환자를 이송하거나, 격리 박스를 치우고 사용했던 침상을 소독제로 청소하는 허드렛일이 주요 일이었다. 낯선 환경에서 나는 신참처럼 눈치껏 움직여야 했다. 여기저기 기계 알람이 울려대고 전화벨 소리에, 도움을 요청하는 환자들의 목소리, 투석을 받으며 식사를 하는 환자들이 보였고, 마스크가 답답하다며 벗으려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마스크와 귀를 덮는 방호복 때문에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목청껏 얘기해야 하는 것도 무더위와 함께 겪어야만 했던 이중고였다. 업무를 시작하기 전 방호복 때문에 화장실에 가기 어려울 테니 물은 덜 마시는 게 좋겠다는 팁도 들었었다. 일리 있는 얘기였다. 그런데 방호복 안으로 땀이 비 오듯 흐르고 고글도 내 체열로 인해 뿌옇게 흐려졌다. 입이 바싹 타들어갔지만 물을 마시러 다녀오기도 힘들었다. 마스크 속 내 얼굴은 일그러졌고 도무지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같은 병원 안에서 이렇게 힘들게 버티고 있었다니, 다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괴로울까,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 나만 힘들다고 생각한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병원 안은 흡사 전쟁터 같았다. 고단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하루종일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일했고 방호복을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해야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장 안타까운 것은 환자들이었다. 단지 그 시각 그 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가족들과 격리된 채 갇혀 지내야했다. 어떤 환자는 병실 문 앞을 서성이며 사람들이 지나가길 기다렸고, 어떤 할머니는 외롭다며 간호사실로 전화를 걸거나 응급벨을 누르기도 했다. 혼자 있는 것이 너무나 무섭다며 누군가 함께 있어주면 좋겠다고 했다. 마음이 아팠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식사를 봐드리거나 TV 채널을 돌려주기도 했지만 계속 같은 공간에 머물 수는 없었다. 내가 매개체가 될 수도 있으니 라운딩을 하는 것도 최소한의 접촉이 원칙이었다. 방호복을 입고 들어가는 것에 대해 기분 나빠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믿기지 않는 현실에 화가 나 말 한마디 않는 사람도 있었다.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 것 같아서 다들 조심조심해야만 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변한 것이 마음 아팠고 지켜보는 것이 괴로웠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긴 터널을 나는 과연 빠져나갈 수 있을까? 끝이 있다는 희망만 있다면, 어떻게든 견뎌볼텐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방은 캄캄한 암흑이다. 앞으로 나아간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어? 의구심마저 든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대체 빛이 있기는 한 걸까?

그렇게 영원할 것만 같았던 시간 뒤로, 뉴스에서는 메르스가 진정세라고 했다. 4주로 예정된 휴업도 앞당겨 종료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별 기대는 없었다. 휴업 전과 같이 사람들은 우리를 바이러스 취급할 것이다. 동료들 사이에서도 분위기는 침체되어 있었다. 마치 이 모든 일련의 시간을 엄숙하게 통과해야만 한다고 약속이라도 한 듯 했다.

그리고 다시 첫 진료를 시작한 월요일.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아직 메르스(MERS)가 끝난 것도 아닌데 병원은 사람들로 붐볐다. 믿을 수가 없었다. 옷깃이라도 닿을까 두려워했던 눈빛은 고생했다며 촉촉한 격려를 보내주었고,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악수를 건네주었다. 수고 많았다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는 분들도 있었다. 감격에 겨워 손을 잡고 우시는 분들도 있었다.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고 달려와 도와주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고. 차를 타고 병원 앞을 지나갈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노라고. 현수막에 걸려 있던 격려의 문구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구나를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우리를 잊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 얼굴에는 연신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오시느라 고생하셨다는 인사가 진심에서 우러나왔다.

우리는 이제 터널 끝에 서 있는 것이다. 완전히 터널 밖으로 나오려면 마지막 안간힘을 써야한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 여기로 오기 위해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렀다. 의료선진국이라 자부하던 우리가 몰랐던 의료시설의 낙후. 가족 간병이라는 오래된 관습이 초래한 비극. 지역방역체계의 강화. 공공병원의 기능과 시설 강화 등 우리가 풀어야할 숙제가 쌓여있다. 위험정보의 공개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우리를 떨게 했던 공포의 실체는 결국 불안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정확한 정보가 없어 질병에 대한 실체를 알 수 없었고, 사람들은 두려움을 갖게 된 것이다.

병원이 먼저 시작했다. 면회시간을 지정하고 방문객을 제한하고 있으며 간호·간병통합서비스를 시작했다. 응급실에서도 보호자 수를 제한하고 격리병상을 늘리는 등 달라지고 있다. 보호구 착용률이 높아졌으며 손위생과 같은 기본적인 감염예방활동은 습관이 되었다.

2015년 여름. 나의 소중한 일상을 되찾은 것에 가슴 깊이 감사하며,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라도, 힘이라도 내어보기로 다짐한다.

편집부  news@koreanurs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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