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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 간호문학상 수기당선
손수건
기사입력 2009-12-28 오후 17:43:35
-최성희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이 무엇일까요? 하나를 뽑는 다면 먹는 즐거움이 아닐까요? 우리의 일상생활을 하다보면 못 먹는 경우와 안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황이야 어떻든, 먹는 즐거움은 세상에서 태어난 다음으로 최고의 축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기 그 축복이라고 하는 이유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우리 집 앞마당에는 백일마다 피고 지는 백일홍이 있습니다. 색깔은 진분홍에 작은 꽃망울이 모여 그 장엄한 자태를 자랑하곤하죠. 저 백일홍이 얼마나 피고 져야 나의 손수건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갈까요?
“손수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슬픈 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줄 수 있고, 힘들 땐
흐르는 땀을 닦아 줄 수 있는 그런 간호사가 되고 싶습니다.” 제가 처음 면접에서 외친 저의 소개 내용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내 마음의 손수건은 이성과 감성을 조절할 줄 아는 백의천사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입원 환자입니다, " 응급실에서 입원환자를 모시고 왔다. 30대 여자환자였고, 보호자로는 남편과 초등학생, 중학생 되어 보이는 남매가 함께 왔다. 복부 통증이 있어 응급실로 방문을 했고, CT 검사와 기타 검사를 통해 위암을 진단 받았지만, 전이 까지 되어 치료가 쉽지 않았다. 병동은 그녀의 위암 진단으로 오열하는 가족의 울분 소리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너무 젊은 나이에 진단을 받은 그 환자의 마음을 만져주기도 전에 쓰러진 부모님을 간호하느라 정신없었고, 다음 근무자에게 stomach ca (위암)여자 환자분이라고 아무 감정 없이 인계를 하는 나는 간호사이다. 임종환자를 보면 나도 모르게 북받쳐 오르는 감성을 억누르며 눈물을 훔치고, 환자의 건강을 위해 아파도 숨 죽여야 했 던 나는 간호사이다. 어떠한 상황에도 울지 않았다, 찡그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짜증내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얼굴은 곧 상대방의 얼굴이라는 저의 부모님 말씀 덕분이죠.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말하죠."성희는 슬픈일이 없냐? 매일 웃는 얼굴이라 보기 좋다야.." 그런데 나요, 이제는 조금 울고 싶고, 찡그리고 싶고, 짜쯩 내고 싶어요.
왜냐구요? 나의 장기중에 위가, 정상인의 1/3 밖에 없거든요, 만 24살 위암 진단 받아 지난 4월27일 위암 수술했습니다. 나 이제 울어도 되나요?
지난 3월 설사를 해서 대장내시경만 하려 던 것을 친언니 설득 끝에 위내시경도 함께 했습니다. 대장은 아무 이상이 없었고, 위 전정부 부위가 좋지 않아 위 조직검사를 했다던 원장님의 말씀이 끝난, 5일후 아침 9시부터 한통의 전화가 울렸습니다. 이상하게 예감이 썩 좋지 않았습니다. 그 전화벨 소리마져 나의 마음을 긴장하게 했으니까요. 보호자와 함께 내원하라는 것이죠, 원장님의 떨리는 목소리로 아주 조심스럽게 저에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위일부를 절제해야 할 것 같으니 다음주 중에 한번 내원하시죠.” 순간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내시경 결과를 봤을때 제가 위암이라는 느낌을 받았으니까요. 위 전정부 조직검사 위치는 암세포가 자라고 있는 것을 저는 미리 알았습니다. 전에 위암센타 근무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한 눈에 관찰이 되었기 때문이죠. 그래도 가슴 한켠으로는 아니길 나는 아닐거야? 조직검사 잘 못 나왔나? 나랑 누가 바뀌었나봐? 하루 동안 고민했습니다. ‘이 일을 어쪄나? 나는 누구에게 먼저 이 사실을 알려야하지?’ 예상 했던 일인데 왜 이렇게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었을까요?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언제나 나와 함께한 가장 가까운 외과 병동 주현이라는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친구는 나이트 근무를 마치고 이른 8시부터 저를 깨웠습니다 “빨리 일어나? 어서 병원가서 우리 눈으로 확인하자?” 그날은 일요일 이였죠. 주현이도 놀란나머지 아닐거야? 넌 걸릴 위험 요소가 없어. 그 다음날이 되었습니다. 친구는 나이트 근무를 또 마치고 무거운 눈을 뜨며 저를 깨웠습니다. 두손을 꼭 잡고 택시를 잡으려는데... 그날은 왜 또 잡히 않는 택시일까요? 두 손에 땀만 흐르고 ,원장님을 찾아 갔습니다. 졸음이 가득찬 얼굴을 한 내 친구 주현이와 나는 원장님 앞에 앉았습니다.
“악성 위암, 악성 위암, 악성 위암입니다.”순간 내 친구는 졸음이 달아 났고, 우리 둘은 멍하니 하얀 벽만을 쳐다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진이 아닐까? 사진으로 봤자나? 예견했자나 성희야? ’내 마음 속에는 여러 뒤죽 박죽 생각들로 복잡해지고 제대로 정신 차려보니, 제가 다니고 있는 대학병원에 와 있었습니다. 내과 과장님을 먼저 만났고, 안타까운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죠.“육안으로도 봐도 암입니다. 젊은 사람일 수 록 조직이 안 좋고 세포 분화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서두릅시다. ” 진단 코드,C코드을 받은 나는 암환자입니다. EUS, PET CT, CT 종양마크 등 정확한 확진을 위한 검사가 진행되는 시간 속에 한 가닥의 희망은 “오진”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비밀로 하고 주현이가 모든 보호자 역할을 했습니다. PET CT, CT 종양마크결과는 TxM0N0 모든 것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인데, EUS 결과는 위를 구성하고 있는 층은 5층인데 3층까지 암세포가 퍼져있다는 것이다. 조직 또한 최악이 였다. SIGNET RING CELL CACINOMA 이 조직은 악성 종양 중 에서도 최고 의 분화속도이고 예후도 안 좋은 아주 나쁜 조직이였죠, 그렇게 외과 협의 진료서의 내용은 24세 여자 stomach ca 환자 라고 써내려가는 내과 교수님 펜끝을 보니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그 서러움은 내 두 볼에 뜨거운 눈물이 말해 주었습니다. 그 동안 아무런 생각없이 봐왔던 환자들, 정말 감당 하기 힘들었을 텐데, 왜 저는 그 부분까지 만져 주지도 못 하며 무의식적이고 반복되는 병원생활을 했을까요? 이 순간 가슴 깊이 느낍니다. 나 지금 너무 힘들고 누가 나 좀 내가 암환자라고 이해시켜 줄 사람 없나요?
그날 밤, 캄캄한 원룸 안은 나를 돌이킬 수없는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자살을 기도하려고 하는 순간, ‘성희야 문 열어라, 우리가 왔다’ 병동 동기들이 짐을 싸가지고 왔더라고요.“파트장님이 네가 딴생각 할까봐 전화하셨어 가보라고” 내 몸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우리 엄마 아빠 형제 자매들의 얼굴이 아른 거리더 군요. 그렇게 상황을 진전 시키고 가족들에게 한통의 전화를 걸 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나의 부모님이 이 전화를 기다리기 위해 몇 일 밤을 지새우셨다고 하는데, 오진이 아니라 악성위암을 전해 드리는 가슴 아픈 심정은 어떤 말로도 표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대성 통곡을 하는 아버지, 서럽게 눈물을 보이시는 어머니, 그 모습을 보곤 참지 못한 나의 형제 자매들의 하염 없는 눈물 속의 오열 끝에 나는 손수건을 들며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고 다녔습니다. 울고 싶어 우는 사람이 어디있겠어요? 웃고 싶어도 눈물이 나는데, 애써 참아 보려 해도 흐르는 눈물을 들키는 순간 아버지는 ‘참지말고, 울고 싶으면 울어라, 성희야 네 가슴 속에 그동안 감당하기 힘들었 던 푸념을 내려 놓으렴? 여기는 너를 지켜줄 가족이 있으니까’ 어리광이라도 피우고 싶었습니다. 아프다고 말하면 정말 아플까봐 슬프다고 말하면 정말 슬플까봐 살아 왔던 지난 날을 후회하며 하염 없이 울었습니다. 누구처럼 내 눈물은 1리터보다 더 많이 흘렸고, 내 손수건 또 한 많이 낡아 지고 있었습니다. 위가 없어지면 맛 있는거 못 먹는다고 지인들은 수술 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들을 사주셨지만, 내 몸 속 이 녀석이 커지고 번질까봐 두려워 먹지 못 했습니다. 우스갯 소리지만 아프니까 호강은 하더라고요.
입원장을 들고 외과병동을 갔고, 병실 배정 후 환의를 갈아 입은 난, 환자 였습니다. 다른 간호사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니 씁쓸한 생각이 들더라구요.
마음은 가벼웠습니다. 상복부 배를 만지며 혼잣말을 했습니다. “미안하다, 위야! 내가 너를 아프게 했구나, 못된 주인을 만나 아프다고 말도 못하고 곧 2/3없어질 나의 소중한 위야, 남아 있는 너를 위해 꼭 최고로 대우 해줄게. 대신 치아는 위를 위해 더 많이 일을 해야 한다, 위가 하지 못한 일을 치아가 대신 해줘야 위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 가니까.”
세상 어떤 무엇보다 따뜻한 마음으로 아픈 사람을 사랑하고, 따뜻한 손으로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는 일이 흥미로워 하늘에서 내려주는 일이라 여기며 나이팅게일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는 대한 민국 간호사입니다. 3교대로 식사 시간, 잠자는 시간 등 모든 것이 불규칙합니다. 어느 연구에 보면 3교대 간호사는 수명이 다른 사람 보다 10년 정도 단명한다고 합니다.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다른 교대 근무자와 교대를 해주어야했기에, 빨리 먹고, 빨리 일어나 분주하게 병실로 돌아가고, 뛰어 가지 않으면 다행이죠, 소화도 안 된 상태에서 일을 시작합니다. 밥을 못 먹고 일하는 날도 허다 합니다. 배 속에서 밥 달라고 소리 쳐도 배고픔을 참고 일을 하며 일 끝나고 가장 위산 분비가 많이 되는 자정 시간이 지나 밥을 먹어야 하니 얼마나 우리 위가 많은 손상을 입을까요? 이렇게 생활하는 것이 우리 간호현실입니다.
수술하는 전날, 가족 모두 긴장을 했고, 나의 곁은 지켜준 것은 우리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도 04년도에 뇌종양으로 치료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저의 손을 꼭 잡으며“6년전 어린 네가 나를 지켜줬으니 이제는 내가 지켜 줄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큰 용기가 되더라고요. 이번 일로 저는 깨달은게 많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주는 소중한 사람, 저를 위해 눈물을 보이는 사람과, 울어주는 사람, 저는 결코 헛되이 살지 않았으며 이 소중한 사람들을 웃을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수술하는 날에 이동 침대를 타고 수술방으로 나섰습니다. 외과 파트장님은 잠 한번 자면 된다고 하시더라구요, 정말 안 아플까? 가족 모두를 뒤로하고 통제구역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본원 간호사라서 좋긴하더라구요. 다들 저를 기다리며, 뜨거운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마취과 의사선생님과 간호사들은 환자인 저를 확인하고 마스크를 씌웠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잤습니다. “최성희님 일어나 보세요? 마취제를 많이 넣어서 안깨어나나?”중환자실 안에서는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눈을 뜨고 싶었는데, 눈이 너무 무거워서 떠지지 않았습니다. 힘을 내어 정신차려보니, 위관삽입되어 있는 튜브, 소변 줄, 중심정맥관, 배에는 2개의 j-pbag그리고 오장이 쏟아질 거 같은 배안의 무언가 까지 내 모습은 직접보진 못 했지만, 정말 가관일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엄마 언니 오빠가 수술을 마치자 마자 동행했습니다. 아파도 그들을 안심시킬려고 내색 안하고 괜찮다고 입을 열었습니다. 수술은 대 성공이라고 하는 의료진의 회진 내용, 그 후 24시간은 제게 있어 악몽이었습니다. 쏟아질 것 같은 배, 수술부위의 통증 끈어 질거 같은 허리 등 시간이 해결 해주길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하루를 중환자실에서 꼬박 세웠습니다. 하루의 관찰후 병실에 올라오니 가족들과동료들이 맞이 해주었습니다. 웃을 수 있었습니다. 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들 엄지 손가락을 세웠기 때문이죠. 그날은 제가 다시 태어나는 날. 더욱 갚진 생명을 얻은 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가스가 나와야한다며 운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제가 일하던 내과병동에 가서도 운동하다 환자와 보호자를 만나고, 그분 들에게 야단도 맞았죠. “간호사가 환자를 간호해야지 아프면 어떻게하나?” 웃음으로 상황을 만들었지만, 마음속에선 간호사였기 때문에 아팠다고 소리쳤습니다. 우리도 인간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큰 문제가 생 겼죠, 잠이 안오는 것이였습니다. 3일밤을 꼬박 눈을 뜨며 세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일이 또 찾아오는 것이죠.. 잠이 안와요, 잠이 안와요,4일째 되던 날 또 저에게 위기의 순간이 찾아 왔습니다. 9층 밑을 쳐다보며 오늘까지 잠이 안온다면 나는 정말 살고 싶지 않다, 그 순간은 뛰어 내리고 싶은 충동이 느꼈습니다. 갑자기 배가 칼로 배는 듯한 통증이 시작되었습니다. 응급벨으르 눌러 간호사를 불렀고, 진통제를 투여하자고 했습니다. 그동안 진통제 부작용이 너무 심해서 참았었는데 그날 만큼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진통제를 투여했습니다. 스르르 오는 잠, 드디어 수면을 취했습니다. 4시간을 잘 수 있었습니다. 엄마한테 자랑을 했죠, 잠이 오더라고요. 식이진행도 시작하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이 되더군요, 호스피스 선배님이 병실에 찾아 오신거예요, 근데 제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여시는 거예요“성희야 너 혈액종양내과로 협진 의뢰왔다. 암세포가 신경세포로 전이 된 상태란다.” 저는 “아니예요, 벌써 결과 나왔다고, 아니라고요” 이 말을 들은 엄마는 병동 모퉁이에서 눈물을 훔치고 나에게 온것이다. “성희야, 엄마 몸에도 암세포가 있고, 다른 사람에도 다 암세포가 있어, 그런데 중요한건 그 세포를 너가 어떻게 죽이는가 문제다, 항상 긍정적인 사고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너는 신경쯤이야 이겨낼 수 있을거야, 암~ ” "엄마 나는 아직 못해 본게 너무 많아서 눈물이 나요, 이대로 죽을 순 없자나요? 엄마도 울었자나, 엄마도 울었자나" 또 다시 암흑같은 시간이 저의 마음을 초조하게 하며 혈액종양내과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환자에게 교육하던 제가 교육을 받아야하는 환자가 되어 앉아있고, 식이교육을 들어도 혈액종양내과의뢰결과 때문에 눈에도 귀에도 들어오질 않았습니다. 그래도 마음 한켠은 담담했습니다.
결과는 위를 절제 했기 때문에 혈액종양내과적인 문제가 없다라고 제 눈으로 확인을 했습니다. 불행중 다행인 것은 정맥 항암제는 안하는 것인거죠, 먹는 항암제만 시작했습니다. 주위사람들은 머리카락 빠지니까 가발 사줄까? 라고 우스갯소리를 했습니다.
저의 배에 난 영광의 상처를 안고 퇴원을 했습니다. 공기 좋고 물 맑은 시골로 요양을 갔습니다. 집 텃밭에다가 위에 좋다는 감자와 토마토를 심었고 유기농만 찾아 식이요법을 시작하였습니다. 암을 이긴 사람들의 식이요법 책도 읽어봤고, 식사 습관도 바꾸고, 맵고 짠 것은 이제 그만, 하루 6끼니를 챙겨 먹었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저도 식이요법 책을 쓰고 싶을 정도로 먹기 싫은 음식, 많은 항암제 음식을 찾아 먹었습니다. 항암제를 하면서 다행이 특별한 부작용도 없었고 모든 것을 행복하게 이겨낼려는 의지만 굳건했습니다. 투병과 요양하면서 가장 힘들었 던 것은 덤핑증후군 증상이었습니다. 위절제한 모든 환자만이 겪을 수 있는 문제점, 시간도 이 문제는 해결해주더라고요, 6개월이 지나고 있는 지금은 항암제도 덤핑 증후군도 안하는 저는 건강한 사람입니다.
우리집 마당 백일홍이 피고 지는 것을 보며 마음 속 손수건은 꺼내보지 못하고 저를 위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간호사이여서 제가 살 수 있었다고들 합니다. 매우 좋은 사명을 받고 일을 해서 이 한 목숨 살려준거래요, 저의 뜨거운 열정을 담은 병원 생활 언제 시작해야하나 저의 손수건도 잠시 쉬고 있습니다. 세상 어떤 무엇보다 따뜻한 마음으로 아픈 사람을 사랑하고, 따뜻한 손으로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는 일이 흥미로워 하늘에서 내려주는 일이라 여기며 나이팅게일의 길을 걷었던 역량있는 최성희 간호사는 이제 가슴 속 손수건을 꺼내 환자를 향해 갑니다. 환자가 되어보니 그들의 마음을 더 헤아릴 수 있는 성숙한 간호사가 되어, 인생의 쉼표을 이제는 지우개로 지우고 백의 천사로 함께합니다. 가슴으로 세상을 보겠습니다. 저를 위해 박수를 보내 주신 분들과 저의 제기를 위해 뜨거운 응원의 기도를 한달 동안 동참해주신 cmc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 제 몸에도 이글을 읽는 여러분도 암세포는 존재하지만 이길 수 있는 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마음 덕분 인 것 같습니다. 오늘도 힘차게 발전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동감을 이끌 수 있는 저는 간호사입니다.





편집부  news@koreanurs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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