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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회 간호문학상 수기 가작
나는 민머리 간호사입니다.
기사입력 2013-12-18 오전 09:23:10
- 김문숙(연세대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간호사이시죠? 유방 조직검사결과가 나왔어요. 될 수 있으면 빨리 근무하시는 병원에 가셔서 진료를 보셔야 할 것 같아요. 결과가 그러니까...암으로......” 원장님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애써 이야기를 마무리 하셨다.
나는 “네. 감사합니다.” 조신하면서도 간략한 인사만을 하고 개인병원을 나섰다. 병원 앞 버스터미널을 지날 때 시끄러운 버스소리와 자동차들의 크락션 소리가 오히려 내 심장을 가만히 두드리는 듯 했다. 마치 내 굳었던 심장을 두드리기라도 하는 듯 했다.
시끄러운 소음소리에 난 혼잣말로 “그래야지. 가야지....”,“그럼, 진료 받으러 가야지...치료 받으면 되지...”, “너 알았잖아....” 중얼중얼 거리며 30여분이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한 시간하고도 30여분이 지나서야 아파트 입구에 와 있는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큰 찻길을 지난 아파트 입구는 유난히 더 고요했다.
집안으로 들어서기를 망설였다. 대낮에 텅 비어있는 집안은 나를 더 심각한 생각을 하게 만들 것은 분명했다. 벤치에 그러고도 한 시간여를 멍하니 있었다. 2012년 9월의 가을은 그렇게 쓸쓸히 나를 맞이했다.
2012년 6월. 여름이 유난히 뜨거워지는 여름. 칠순의 중턱을 막 넘긴 친정아버지께서는 건강검진 내시경 검사에서 위암을 확진 받으셨다. 지난 2005년 협심증으로 관상동맥 우회술을 받으시고는 고생스런 그때의 몇 개월을 그저 그때가 다시 태어난 해라고 간단히 말씀하시곤 했다.
간호사로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에 근무한지 1년여 만에 친정엄마는 당뇨합병증으로 만성신부전 치료를 받으시러 딸이 근무하는 원주 병원의 환자가 되셨다. 투병생활 중 당뇨성 망막증으로 수술치료를 받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엔 시력까지 잃으시는 안타까운 일을 겪으셨다. 그렇게 몇 년을 고생하시다 끝내는 우리가족을 등지고 마셨다.
그 이후로 친정아버지는 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너 아니면 엄마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갔을꺼야... 니가 고생이 많았다. 이제 너 고생은 안 시키마. 원주 쪽으로는 여행도 안 올게...”
그러던 친정아버지가 심장수술을 받아야 했던 2005년은 응급수술이라 거부도 못하시고 그냥 딸이 하자는 대로 수술을 받으셨고 중환자실의 힘든 병상도 묵묵히 받아들이셨다.
그런 아버지에게 2012년 여름. 위암이라는 달갑지 않은 암 확진판정을 받으셨다. 암 확진이 나온 뒤에 아버지께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셨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가족과 본인의 질병이 차라리는 모른척하고 싶으셨을 게다.
2012년 7월 초복날 아침에 가족들은 친정아버지를 수술실로 들여보냈다. 심장수술 과거력이 있으신 아버지는 중환자실 자리를 예약하고 수술을 진행하고 있었다. 2남2녀 중 맏이인 나는 동생들을 애써 위로했다. 동생들은 수술시간 내내 그런 내 얼굴을 보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 속내는 다른 잡생각들로 가득했다.
왜냐면, 지난달부터 오른쪽 가슴으로 만져지는 멍울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다. “차근차근 하나씩 해결해 가자꾸나. 그러면 되잖아. 아빠부터 수술하고, 어느 정도 회복되시면 내가 치료 받으면 돼!” 손끝으로 만져지는 가슴의 멍울을 대면했을 때 난 이미 암 덩어리라는 불길하고도 느닷없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직감이라고 해야 할까?... 날 어여삐 여겨서였을까? 아님, 애처로워서 일까? 아버지는 다행히도 잘 견디시어 일반병실에서 가족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고 친정아버지는 서서히 회복되고 계셨다.
“아빠한테 얘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다음 진료 받으러 올 때 언니가 안 나타나면 이상하게 생각하실 텐데...” 유방암 덩어리가 4.5cm이나 되어 난 이미 3번의 항암치료를 받고 까까머리가 된 큰딸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막내 여동생의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나에게 하는 최후통첩이었다. 나를 때론 돌아가신 엄마대신으로 여길 만큼 많은 의지를 했던 아버지에게 나의 병명은 당신의 암환자라는 이름표보다도 더 힘겨운 선고였기 때문이었다. 수술하는 날 새벽에 아버지는 연락도 없이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 병실에 조용히 들어오셨다. 그리곤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 걱정은 마. 내가 알아서 잘 회복하고 너 신경 안 쓰이게 잘 할게.” 그렇게 인사를 대신하셨다. 비로소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조용한 주말에 우리 네 식구는 거실에 모였다. 주말부부인 남편도, 대학에서 간호학을 전공하느라 떨어져 지내던 딸도, 고2라고 늦은 귀가를 하는 아들도 모두 모였다. 조직검사결과를 얘기하기에는 고요하고도 평화로운 밤이었다. 식구들에게 어찌 얘기를 꺼내야 하나를 고민하던 나는 불현듯 그냥 지금 툭~하고 말을 내던져야 한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심각하게 얘기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마치 남의 얘기를 하듯 “나 암이래. 유방암이래. 치료받으면 돼. 담주에 외래에 진료 받으러 갈꺼야” 비수와 같은 말들을 잔인하게 던졌다.
남편과 아이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질문도 하지 못했다. 이상한 분위기를 직감한 강아지 마루는 조용히 꼬리를 내리며 눈치만 살폈다. 동물적인 직감인가 싶다.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딸아이가...사내치고는 여린 고2 울 아들은 어깨를 들썩인다. 어린나이에 만나 연애만 7년 해 온 7살이나 나보다 어른인 남편이 운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다음 말을 잇질 못했다. 울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우리 식구들 중에는 가장 독하고 강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난 이런 일 많이 겪었으니까...그리고 난 간호사니까....
3번의 항암치료 후 나와 함께인 암 덩어리는 고맙게도 4.5cm에서 1cm으로 줄어들었다. 낙엽이 떨어지고 스산해지는 2012년 11월에 난 수술대에서 겨울을 준비했다. 친정아버지도 잘 회복하고 계시고, 가족들도 좀 안정이 되었고, 병원에는 휴직계를 냈고, 대학원생들 임상지도 자리도 내려놓았고, 보수교육 강사도 반납하고.. 모두가 정리되었다. 이제는 내가 오롯이 암환자가 될 수 있었다. 환자로서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었다.
힘들다고 하는 항암치료도 내게는 그저 환자체험이었다. 1차 항암을 하고 2주가 지난 후 방바닥에 긴 머리카락이 떨어졌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막내여동생과 미용실에 가서 미처 해보지 못했던 단발머리를 과감히 시도했다. 맘에 들었다. 평상시에 항상 긴 머리였던 나를 갑자기 민머리로 마주대할 식구들을 볼 자신이 없었다. 길목으로 가는 과정이랄까? 고심해서 자른 내 예쁜 머리는 채 3일을 넘기지 못했다. 한 움큼씩 빠지던 내 머리는 남편이 아침준비를 하던 일요일에 머리반이 들려버리듯 빠져버렸다. 감던 머리를 닦지도 못하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채 두건으로 감싸고 집 앞 미용실로 향했다. “여보! 나 잠깐 나갔다 올게. 금방 와.” 뒷말을 잇질 못했다. 딱히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막 미용실에 도착 했을 때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 갔냐고 물었다. “여보! 나 머리밀러..밥 먼저 먹고 있어.” 남편은 더 이상 묻질 않았다. 민머리를 두건으로 감싸고 집안에 들어서니 남편과 딸, 아들이 마치 교무실에 불려온 사고 친 학생마냥 두 손들을 포개어 무릎에 가지런히 올리고선 셋이 나란히 있었다. 그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안쓰러움은 둘째 치고 소심한 가족들의 찌그러진 얼굴은 나를 오히려 웃게 만들었다. 그 날 아침 남편이 해준 호박전은 유난히 맛났었다.
수술 후 3번 예정이었던 항암치료는 1번의 추가 투여로 끝이 났다. 그 후로 33번의 방사선치료를 받으면서 그렇게 겨울을 보냈다. 때론 입안이 짓무르고 피부가 벗겨지고 가렵고 울렁증이 나고 근육통, 불면증에 시달리지만 난 생각을 뒤집었다. 힘들어 죽을 것 같다기보다는 교과서 대로구나, 진짜 항암치료의 부작용이 이런 거였구나를 느끼면서 따뜻한 봄날을 기약했다.
내게 부정보다는 긍정의 힘이 제일 좋은 약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을 고쳐먹는 것만으로도 가능한 일이라고 최면을 걸었다. 그건 나만이 할 수 있고 오롯이 내가 견뎌야 하는 시간이었다. 봄을 준비하면서 내 몸은 재생을 위해 호르몬치료와 표적치료를 진행하고 있었다. 친정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중증환자가 되었고 암환자 친구가 되었다. 가끔은 힐링 여행이라며 여동생과 어린 조카까지 동원하여 기차여행이며 맛따라 길따라 여행을 하곤 하며 지냈다. 암환자가 둘이나 있었지만 행복한 가족여행이었다.
중환자실과 외과병동, EMR 준비를 하던 간호정보실을 거쳐 재활병동에서 7개월째 근무를 하다 휴직을 했다. 난 그 재활병동으로 일 년 만에 돌아왔다. 예전에 낯이 익은 간병인이 인사를 건넨다. “선생님, 어느 병동으로 가셨었어요? 안 보이시더라구요. 이 병동으로 또 옮기신 거예요?” 난 배실배실 웃으며 대답한다. “네. 다시 왔어요. 여기가 좋아서요.” 암환자인 내가 다시 하얀 가운을 입고 환자들을 만나는 간호사로 돌아온 지 이제 겨우 한 달 남짓이다.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의 24년 근무간호사가 아닌 신입간호사가 되어 돌아왔다. 갑작스런 사고로, 때론 지병으로 생긴 후유증으로 병원생활 중 가장 지치고 힘든 재활병동 환자들을 난 매일 만난다. 간호사가 아닌 같은 환자의 입장으로 말이다.
요즘 병원에서는 환자들과의 공감을 위해서 한 달에 한 가지씩 주제를 정하여 환자체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주사 맞아보기, 휠체어 타고 이동해 보기, 혈액검사 해보기, 연하장애 환자가 섭취하는 thickner 사용해 보기 등을 진행한다.
환자가 된 나로서는 정말 필요한 체험이고 공감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난 혼잣말을 되뇌인다. “정말로 이 체험을 통해 간호사들이 환자들의 마음과 고통과 염려를 공감하고 인정할 수 있을까?” 난 어리석고도 교만한 생각을 한다. 간호사 유니폼을 입고 24년 임상생활을 하면서 무심코 대해버린 환자와 가족이 얼마일까를 고민하면서 반성해 본다.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작은 암 덩어리 하나 내어주고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나 자신을 혹독히 부리지 않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얻었고, 가족들의 사랑과 배려를 얻었으며 직장 동료들의 따뜻함을 얻었다. 모두의 사랑으로 이제 내가 다시 간호사의 이름으로 임상에 할 수 있음이 새삼 감격스럽고 행복하다.
오늘은 교통사고로 다친 다리의 물리치료를 위해 내원한 환자의 오른쪽 겨드랑이의 지방종이 조직검사 결과에서 악성림프종이라는 확진이 나왔다. 미혼인 마흔이 넘은 남환은 혼자서 그 결과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힘겨워하고 있었다. 병동 순회 시 커튼이 드리워진 환자 곁 핸드폰에서는 ‘Let it be’가 조용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암흑의 시간 속에서 헤매이고 있을 때에도 어머니는 내 앞에 똑바로 서서 지혜의 말씀을 해주셨어요. 순리에 맡기거라. 그냥 그대로 두어라. 순리에 맡기거라. 상심을 겪게 되는 사람들이 좌절을 할 때에도 세상을 살아가며 현명한 대답이 있어요. 순리에 맡기거라.”-
순간 울컥하는 마음을 감추기 바빴다. 내가 투병생활을 하던 내내 가족들에게 아픈 걸 내색하지 않고 혼자 감당하려고 늘 귀에 꽂고 들었던 가사였다. 대중이 사랑하는 올드팝은 투병생활 이전의 노래가 아닌 내게는 신앙의 말씀 그 이상이었다.
환자에게 다가갔다. 그냥 등을 두드리고 손을 잡아주는 것 이외에는 딱히 위로가 되어줄 수 없었다. 입원 후 예민하던 환자는 내게 조용히 손을 내어주었다. 언제까지 임상에서 환자분들을 마주할지 모르지만 내게 암 덩어리는 또 다른 숙명을 준 듯하다. 환자 곁에서 위로가 되어주고 공감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되라고...., 간호사 유니폼이 사랑이 될 수 있도록 하라고.....
간호대에 재학 중인 내 딸은 항상 엄마 때문에 엄마로 인해 간호사를 꿈꾼다고 했다. 나는 가끔은 3교대 근무에 찌들고 힘겨워하면서 바쁜 일상을 보내는 간호사 생활에 대해서 회의를 느낀다고 토로할 때도 있었다. 그 간호사의 길을 왜 가려고 하냐고 난 딸아이에게 묻는다.
딸아이는 내게 대답한다. 엄마 때문이라고.... 단 한마디로 이야기 한다. 그런 간호사가 되렵니다. 임상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허락될지는 모르겠지만 내 아이가 믿어주는 간호사, 환자 곁에서 암환자가 아닌 그들과 공감하며 함께 투병하는 간호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나는 민머리 간호사입니다. 하지만 마음만은 가득한 간호사이고 싶습니다. 나의 이 희망이 퇴색되지 않기를 희망하고 희망합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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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이시죠? 유방 조직검사결과가 나왔어요. 될 수 있으면 빨리 근무하시는 병원에 가셔서 진료를 보셔야 할 것 같아요. 결과가 그러니까...암으로......” 원장님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애써 이야기를 마무리 하셨다.
나는 “네. 감사합니다.” 조신하면서도 간략한 인사만을 하고 개인병원을 나섰다. 병원 앞 버스터미널을 지날 때 시끄러운 버스소리와 자동차들의 크락션 소리가 오히려 내 심장을 가만히 두드리는 듯 했다. 마치 내 굳었던 심장을 두드리기라도 하는 듯 했다.
시끄러운 소음소리에 난 혼잣말로 “그래야지. 가야지....”,“그럼, 진료 받으러 가야지...치료 받으면 되지...”, “너 알았잖아....” 중얼중얼 거리며 30여분이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한 시간하고도 30여분이 지나서야 아파트 입구에 와 있는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큰 찻길을 지난 아파트 입구는 유난히 더 고요했다.
집안으로 들어서기를 망설였다. 대낮에 텅 비어있는 집안은 나를 더 심각한 생각을 하게 만들 것은 분명했다. 벤치에 그러고도 한 시간여를 멍하니 있었다. 2012년 9월의 가을은 그렇게 쓸쓸히 나를 맞이했다.
2012년 6월. 여름이 유난히 뜨거워지는 여름. 칠순의 중턱을 막 넘긴 친정아버지께서는 건강검진 내시경 검사에서 위암을 확진 받으셨다. 지난 2005년 협심증으로 관상동맥 우회술을 받으시고는 고생스런 그때의 몇 개월을 그저 그때가 다시 태어난 해라고 간단히 말씀하시곤 했다.
간호사로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에 근무한지 1년여 만에 친정엄마는 당뇨합병증으로 만성신부전 치료를 받으시러 딸이 근무하는 원주 병원의 환자가 되셨다. 투병생활 중 당뇨성 망막증으로 수술치료를 받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엔 시력까지 잃으시는 안타까운 일을 겪으셨다. 그렇게 몇 년을 고생하시다 끝내는 우리가족을 등지고 마셨다.
그 이후로 친정아버지는 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너 아니면 엄마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갔을꺼야... 니가 고생이 많았다. 이제 너 고생은 안 시키마. 원주 쪽으로는 여행도 안 올게...”
그러던 친정아버지가 심장수술을 받아야 했던 2005년은 응급수술이라 거부도 못하시고 그냥 딸이 하자는 대로 수술을 받으셨고 중환자실의 힘든 병상도 묵묵히 받아들이셨다.
그런 아버지에게 2012년 여름. 위암이라는 달갑지 않은 암 확진판정을 받으셨다. 암 확진이 나온 뒤에 아버지께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셨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가족과 본인의 질병이 차라리는 모른척하고 싶으셨을 게다.
2012년 7월 초복날 아침에 가족들은 친정아버지를 수술실로 들여보냈다. 심장수술 과거력이 있으신 아버지는 중환자실 자리를 예약하고 수술을 진행하고 있었다. 2남2녀 중 맏이인 나는 동생들을 애써 위로했다. 동생들은 수술시간 내내 그런 내 얼굴을 보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 속내는 다른 잡생각들로 가득했다.
왜냐면, 지난달부터 오른쪽 가슴으로 만져지는 멍울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다. “차근차근 하나씩 해결해 가자꾸나. 그러면 되잖아. 아빠부터 수술하고, 어느 정도 회복되시면 내가 치료 받으면 돼!” 손끝으로 만져지는 가슴의 멍울을 대면했을 때 난 이미 암 덩어리라는 불길하고도 느닷없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직감이라고 해야 할까?... 날 어여삐 여겨서였을까? 아님, 애처로워서 일까? 아버지는 다행히도 잘 견디시어 일반병실에서 가족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고 친정아버지는 서서히 회복되고 계셨다.
“아빠한테 얘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다음 진료 받으러 올 때 언니가 안 나타나면 이상하게 생각하실 텐데...” 유방암 덩어리가 4.5cm이나 되어 난 이미 3번의 항암치료를 받고 까까머리가 된 큰딸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막내 여동생의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나에게 하는 최후통첩이었다. 나를 때론 돌아가신 엄마대신으로 여길 만큼 많은 의지를 했던 아버지에게 나의 병명은 당신의 암환자라는 이름표보다도 더 힘겨운 선고였기 때문이었다. 수술하는 날 새벽에 아버지는 연락도 없이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 병실에 조용히 들어오셨다. 그리곤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 걱정은 마. 내가 알아서 잘 회복하고 너 신경 안 쓰이게 잘 할게.” 그렇게 인사를 대신하셨다. 비로소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조용한 주말에 우리 네 식구는 거실에 모였다. 주말부부인 남편도, 대학에서 간호학을 전공하느라 떨어져 지내던 딸도, 고2라고 늦은 귀가를 하는 아들도 모두 모였다. 조직검사결과를 얘기하기에는 고요하고도 평화로운 밤이었다. 식구들에게 어찌 얘기를 꺼내야 하나를 고민하던 나는 불현듯 그냥 지금 툭~하고 말을 내던져야 한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심각하게 얘기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마치 남의 얘기를 하듯 “나 암이래. 유방암이래. 치료받으면 돼. 담주에 외래에 진료 받으러 갈꺼야” 비수와 같은 말들을 잔인하게 던졌다.
남편과 아이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질문도 하지 못했다. 이상한 분위기를 직감한 강아지 마루는 조용히 꼬리를 내리며 눈치만 살폈다. 동물적인 직감인가 싶다.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딸아이가...사내치고는 여린 고2 울 아들은 어깨를 들썩인다. 어린나이에 만나 연애만 7년 해 온 7살이나 나보다 어른인 남편이 운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다음 말을 잇질 못했다. 울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우리 식구들 중에는 가장 독하고 강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난 이런 일 많이 겪었으니까...그리고 난 간호사니까....
3번의 항암치료 후 나와 함께인 암 덩어리는 고맙게도 4.5cm에서 1cm으로 줄어들었다. 낙엽이 떨어지고 스산해지는 2012년 11월에 난 수술대에서 겨울을 준비했다. 친정아버지도 잘 회복하고 계시고, 가족들도 좀 안정이 되었고, 병원에는 휴직계를 냈고, 대학원생들 임상지도 자리도 내려놓았고, 보수교육 강사도 반납하고.. 모두가 정리되었다. 이제는 내가 오롯이 암환자가 될 수 있었다. 환자로서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었다.
힘들다고 하는 항암치료도 내게는 그저 환자체험이었다. 1차 항암을 하고 2주가 지난 후 방바닥에 긴 머리카락이 떨어졌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막내여동생과 미용실에 가서 미처 해보지 못했던 단발머리를 과감히 시도했다. 맘에 들었다. 평상시에 항상 긴 머리였던 나를 갑자기 민머리로 마주대할 식구들을 볼 자신이 없었다. 길목으로 가는 과정이랄까? 고심해서 자른 내 예쁜 머리는 채 3일을 넘기지 못했다. 한 움큼씩 빠지던 내 머리는 남편이 아침준비를 하던 일요일에 머리반이 들려버리듯 빠져버렸다. 감던 머리를 닦지도 못하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채 두건으로 감싸고 집 앞 미용실로 향했다. “여보! 나 잠깐 나갔다 올게. 금방 와.” 뒷말을 잇질 못했다. 딱히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막 미용실에 도착 했을 때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 갔냐고 물었다. “여보! 나 머리밀러..밥 먼저 먹고 있어.” 남편은 더 이상 묻질 않았다. 민머리를 두건으로 감싸고 집안에 들어서니 남편과 딸, 아들이 마치 교무실에 불려온 사고 친 학생마냥 두 손들을 포개어 무릎에 가지런히 올리고선 셋이 나란히 있었다. 그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안쓰러움은 둘째 치고 소심한 가족들의 찌그러진 얼굴은 나를 오히려 웃게 만들었다. 그 날 아침 남편이 해준 호박전은 유난히 맛났었다.
수술 후 3번 예정이었던 항암치료는 1번의 추가 투여로 끝이 났다. 그 후로 33번의 방사선치료를 받으면서 그렇게 겨울을 보냈다. 때론 입안이 짓무르고 피부가 벗겨지고 가렵고 울렁증이 나고 근육통, 불면증에 시달리지만 난 생각을 뒤집었다. 힘들어 죽을 것 같다기보다는 교과서 대로구나, 진짜 항암치료의 부작용이 이런 거였구나를 느끼면서 따뜻한 봄날을 기약했다.
내게 부정보다는 긍정의 힘이 제일 좋은 약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을 고쳐먹는 것만으로도 가능한 일이라고 최면을 걸었다. 그건 나만이 할 수 있고 오롯이 내가 견뎌야 하는 시간이었다. 봄을 준비하면서 내 몸은 재생을 위해 호르몬치료와 표적치료를 진행하고 있었다. 친정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중증환자가 되었고 암환자 친구가 되었다. 가끔은 힐링 여행이라며 여동생과 어린 조카까지 동원하여 기차여행이며 맛따라 길따라 여행을 하곤 하며 지냈다. 암환자가 둘이나 있었지만 행복한 가족여행이었다.
중환자실과 외과병동, EMR 준비를 하던 간호정보실을 거쳐 재활병동에서 7개월째 근무를 하다 휴직을 했다. 난 그 재활병동으로 일 년 만에 돌아왔다. 예전에 낯이 익은 간병인이 인사를 건넨다. “선생님, 어느 병동으로 가셨었어요? 안 보이시더라구요. 이 병동으로 또 옮기신 거예요?” 난 배실배실 웃으며 대답한다. “네. 다시 왔어요. 여기가 좋아서요.” 암환자인 내가 다시 하얀 가운을 입고 환자들을 만나는 간호사로 돌아온 지 이제 겨우 한 달 남짓이다.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의 24년 근무간호사가 아닌 신입간호사가 되어 돌아왔다. 갑작스런 사고로, 때론 지병으로 생긴 후유증으로 병원생활 중 가장 지치고 힘든 재활병동 환자들을 난 매일 만난다. 간호사가 아닌 같은 환자의 입장으로 말이다.
요즘 병원에서는 환자들과의 공감을 위해서 한 달에 한 가지씩 주제를 정하여 환자체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주사 맞아보기, 휠체어 타고 이동해 보기, 혈액검사 해보기, 연하장애 환자가 섭취하는 thickner 사용해 보기 등을 진행한다.
환자가 된 나로서는 정말 필요한 체험이고 공감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난 혼잣말을 되뇌인다. “정말로 이 체험을 통해 간호사들이 환자들의 마음과 고통과 염려를 공감하고 인정할 수 있을까?” 난 어리석고도 교만한 생각을 한다. 간호사 유니폼을 입고 24년 임상생활을 하면서 무심코 대해버린 환자와 가족이 얼마일까를 고민하면서 반성해 본다.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작은 암 덩어리 하나 내어주고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나 자신을 혹독히 부리지 않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얻었고, 가족들의 사랑과 배려를 얻었으며 직장 동료들의 따뜻함을 얻었다. 모두의 사랑으로 이제 내가 다시 간호사의 이름으로 임상에 할 수 있음이 새삼 감격스럽고 행복하다.
오늘은 교통사고로 다친 다리의 물리치료를 위해 내원한 환자의 오른쪽 겨드랑이의 지방종이 조직검사 결과에서 악성림프종이라는 확진이 나왔다. 미혼인 마흔이 넘은 남환은 혼자서 그 결과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힘겨워하고 있었다. 병동 순회 시 커튼이 드리워진 환자 곁 핸드폰에서는 ‘Let it be’가 조용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암흑의 시간 속에서 헤매이고 있을 때에도 어머니는 내 앞에 똑바로 서서 지혜의 말씀을 해주셨어요. 순리에 맡기거라. 그냥 그대로 두어라. 순리에 맡기거라. 상심을 겪게 되는 사람들이 좌절을 할 때에도 세상을 살아가며 현명한 대답이 있어요. 순리에 맡기거라.”-
순간 울컥하는 마음을 감추기 바빴다. 내가 투병생활을 하던 내내 가족들에게 아픈 걸 내색하지 않고 혼자 감당하려고 늘 귀에 꽂고 들었던 가사였다. 대중이 사랑하는 올드팝은 투병생활 이전의 노래가 아닌 내게는 신앙의 말씀 그 이상이었다.
환자에게 다가갔다. 그냥 등을 두드리고 손을 잡아주는 것 이외에는 딱히 위로가 되어줄 수 없었다. 입원 후 예민하던 환자는 내게 조용히 손을 내어주었다. 언제까지 임상에서 환자분들을 마주할지 모르지만 내게 암 덩어리는 또 다른 숙명을 준 듯하다. 환자 곁에서 위로가 되어주고 공감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되라고...., 간호사 유니폼이 사랑이 될 수 있도록 하라고.....
간호대에 재학 중인 내 딸은 항상 엄마 때문에 엄마로 인해 간호사를 꿈꾼다고 했다. 나는 가끔은 3교대 근무에 찌들고 힘겨워하면서 바쁜 일상을 보내는 간호사 생활에 대해서 회의를 느낀다고 토로할 때도 있었다. 그 간호사의 길을 왜 가려고 하냐고 난 딸아이에게 묻는다.
딸아이는 내게 대답한다. 엄마 때문이라고.... 단 한마디로 이야기 한다. 그런 간호사가 되렵니다. 임상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허락될지는 모르겠지만 내 아이가 믿어주는 간호사, 환자 곁에서 암환자가 아닌 그들과 공감하며 함께 투병하는 간호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나는 민머리 간호사입니다. 하지만 마음만은 가득한 간호사이고 싶습니다. 나의 이 희망이 퇴색되지 않기를 희망하고 희망합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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