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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간호 가르쳐주신 영원한 멘토
곽 성 실 (인천시간호사회장)
기사입력 2007-05-02 오전 09:25:54

** 왕매련 선생님을 추모하며

 1973년 큰아버지의 추천으로 인천간호전문학교(현 안산1대학)에 입학했다. 갸름한 얼굴에 유난히 큰 캡을 쓴 킹슬리(왕매련 선교사)라는 미국분이 학감을 맡아 우리를 가르치신다고 했다. 6 25전쟁이 막 끝난 뒤 한국에 오신 분으로 우리말을 잘 하셨다.

 선생님은 강의실 앞 작은 칠판에 `○○○학생 학감실로'라고 써 놓고 학생을 호출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잔뜩 겁을 먹고 가보면 "요즘 땅만 보고 다니는데 걱정이 있는가?" "여드름이 많이 나는데 비타민이 도움이 될 거야." "얼굴빛이 어두운데 집안에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가?"라고 물으시며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여 주셨다. 당시에는 그런 관심이 지나치다 생각하고 "이 학교는 고등학교 보다 더 지독해"라며 불평하곤 했다.

 대학을 1회로 졸업하게 됐을 때 선생님은 큰 병원에서 훈련을 받는 것이 앞으로 간호사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며 세브란스병원을 추천해주셨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동안 어려운 점 없이 즐겁게 일하면서 선생님이 얼마나 잘 가르쳐 주셨는지를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나를 도와주시려고 집 보는 일을 맡겨주셨는데, 곳곳에서 검소하고 알뜰한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옷이나 신발 등 어느 것 하나 골동품 아닌 것이 없었다. 난방 대신 숄이나 담요를 활용해 추위를 견디셨고, 수도꼭지는 세게 틀어도 졸졸 흐르도록 조절해 놓으셨다.

 선생님의 돌아가신 어머님을 추도하며 교회에서 장례예배를 드렸던 일, 환갑을 맞으셨을 때 고운 한복을 해드리자 소녀처럼 좋아하시던 모습, 미국으로 돌아가시기 전 드린 송별예배 등이 눈에 선하다.

 4월 4일 선생님의 부음을 듣고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전쟁 후 헐벗고 굶주린 한국에 오셔서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베푸신 선생님. 기술이 뛰어난 간호사보다 먼저 인간을 사랑하는 참된 간호사가 되기를 원하셨던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에 겸손과 섬기는 삶을 배웠다.

 지금도 동기들이 모이면 모두가 입을 모아 선생님의 기도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게 된 거라고 얘기하곤 한다. 선생님의 제자로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해 본다.

곽성실 (인천시간호사회장)

편집부  news@koreanurs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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