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 밥
송성연 (두원공과대 2학년)
스타킹을 신은 다리가 시리다. 무릎만 차가워서 두 무릎을 손으로 꼭 감쌌다. 나일론 천 격자 사이에 스며든 척척한 빗물이 느껴졌다. 히터에선 뜨거운 바람이 나와 상체를 덥혔다. 위와 아래의 극명한 체온 차이에 머리가 멍해지기 시작했다. 졸음이 슬금슬금 달콤하게 스며들어온다. 무거워지는 눈꺼풀에서 힘을 빼는 순간 난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안락의자에 등을 기댄다. 편의점 계산대 뒤에 앉아 두 무릎을 꼭 쥔 채 꾸벅꾸벅 졸던 알바생은 곧 잠에 빠져들고 만다. 딸랑, 이며 유리문을 벌컥 연 손님은 알바생의 그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 발길을 돌린다.
난 분명 깊이 잠들어 있는데 이 모든 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빗방울이 아스팔트 바닥을 쳐대는 사나운 두드림과 뿌연 안개를 걷어내는 자동차의 클랙슨 소리, 히터가 돌아가는 낮은 기계음, 세찬 바람에 펄럭이는 플래카드. 그리고 그 모든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다. 이런 걸 선잠이라 부르나. 비 내리는 3월, 질척한 스타킹이 무릎을 발갛게 만드는 싸늘한 날씨에 난 세상모르고 선잠을 자고 있다. 뜨뜻한 히터를 옆에 두고, 손님이 오든 말든, 높게 세워둔 우유박스가 비바람에 휘청이든 말든, 자울자울 잠이 주는 달콤함에 의식을 내어주고 있었다.
나를 깨운 건 편의점 알바생이 자는 걸 근무태만이라 여기는 냉정한 손님도, 우당탕탕 넘어지는 우유박스도 아니었다. 가게 밖에서 들려오는 한 여성의 목소리에 난 흠칫거리며 잠에서 깨었다. 두 볼이 데인 것처럼 뜨겁고 상체는 기분 좋게 따뜻한데 반해, 발은 여전히 냉골이었고, 두 무릎은 차디 찬 빙산 같았다. 다시 한 번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며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칠판을 긁는 것 같이 째지는 목소리였다. 편의점 밖에서 들려왔지만 그 주파수가 너무 높아 가게를 둘러싼 통유리를 깨뜨릴 것만 같았다. 너무나 듣기 싫어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야기의 내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여자가 아주 화가 나있다는 것과 상대에게 말할 틈조차 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저렇게 흥분해서 끊임없이 소리를 지르다간 제풀에 지쳐 곧 쓰러지겠지 싶었다.
나는 여자의 고주파를 배음으로 깔곤 청소를 시작했다. 번화가에 있지만 진짜 번화가에 있지는 않은 이 편의점은 더러웠다. 화려한 조명과 노출을 즐기는 여자들, 술에 전 남자들이 휘청이며 밤을 보내고 나면 그 오물들은 모두 거리로 토해졌다. 아침이 와도 상쾌한 공기와 신선한 바람은 없었다. 미적지근한 공기에 섞인 토사물과 음식물 쓰레기 냄새, 온갖 식탐의 흔적들만 거리를 뒹굴 뿐이었다. 편의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해장라면을, 해장술을, 해장담배를, 해장음료를, 심지어 해장샴푸를 샀다. 그리곤 편의점에서 해장을 넘어선 관장을 했다. 먹기 위해 다시 뱉어내는지, 뱉어내기 위해 또 먹는지 알 수 없는 무의미한 행위들이었다.
내가 일하는 편의점은 번화가에 있었지만 진짜 번화가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길 가다 있으니까 들릴 곳이었지, 그곳에 그 편의점 있잖아, 하며 들릴 곳은 아니었다. 그만큼 숨어있었고 어정쩡하게 후진 곳에 위치해있었다. 편의점을 찾아보자. 번화가를 따라 쭉 올라오면 24시간 설렁탕집과 왜 24시간 하는 지 알 수 없는 도넛집이 보인다. 조금 더 올라오면 빨간 줄이 매력적인 커다란 편의점이 왼쪽으로 길을 내어주며 모퉁이에 서있다. 하지만 내가 그곳에서 일하는 건 아니다. 빨간 줄이 매력적인 편의점을 만나면 왼편으로 휙 방향을 꺾자. 그럼 정면에 수많은 모텔들이 빨강, 초록, 노랑 등 원색의 네온사인을 밝히며 높게 높게 서있을 것이다. 그 불빛을 보며 조금 더 걷는다. 왼편엔 족발집, 오른편엔 순대국밥집이 서로 경쟁하는 양 마주보고 서있고, 정면엔 바(BAR)와 찜질방, 모텔이 세를 내고 있는 커다란 4층 건물이 기세 좋게 자리 잡고 있다.
그 건물 건너편, 순대국밥집 옆에 내가 일하는 편의점이 있다. 모퉁이에 자리 잡았기에 삼거리를 향해 비스듬히 입을 벌리고 있는 꼴이 조금은 위태로워 보인다. 하지만 두 면이 유리창이었기에 탁하지 않았고 항상 밝은 곳이었다. 술을 사고, 술을 먹고, 술을 뱉는 거리라는 점, 그래서 늘 더럽다는 점만 빼면 근무환경은 좋았다. 가게는 넓었고 숨통도 트여있었다. 전에 일했던 지하철역의 편의점은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을 뿐더러 좁은 공간인데 환기도 안 돼, 마치 화장실 칸막이에서 일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난, 넓고 밝은 이곳이 좋았다.
편의점 유리문을 열면 보이는 건너편 4층 건물엔 자랑 아닌 자랑이 있었는데, 바로 모텔 입구를 지키고 서있는 스핑크스 조각상이었다. 모텔의 이름은 ‘모텔 파라오’였고, 때문에 주인장은 파라오를 닮은 스핑크스가 입구를 지켜야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높이 1미터가 조금 넘는 초소형 스핑크스는 대단히 조잡했고 어딘가 비율이 이상해서 얼간이 같았다. 늠름한 기상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대신 멍청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스핑크스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파라오 모텔 입구에 멍하니 앉아, 낮에는 아이들이 타고 노는 놀이기구가, 밤에는 취객들의 든든한 의자가 되어주었다.
시식대엔 눌어붙은 라면 몇 가닥과 삼각 김밥에서 떨어져 나온 밥알이 조금 붙어있을 뿐 대체로 양호한 편이었다. 걸레를 빨아 매대를 닦고, 밀걸레로 바닥청소를 했다. 이른 오후라 그런지 가게는 한산했지만 날씨 탓에 사방이 어두웠다. 비구름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차가운 비를 계속 뿌려댔다. 봄이라는 3월인데, 봄답지 않은 추위는 계속됐다. 오늘은 비까지 내리니 체감기온이 두 배는 더 내려간 것 같았다. 난 계속 무릎이 시렸고, 이게 추위 때문인지 멈출 줄 모르는 여자의 소름끼치는 목소리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청소를 완전히 마친 나는 자리로 돌아와 히터에 두 무릎을 대었다. 한 순간 뜨거웠지만 아늑하거나 따뜻하진 않았다. 등 뒤 유리 너머로 여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난 비로소 여자를 보기 위해 몸을 돌려 유리창에 코를 바짝 댔다. 여자는 편의점 바로 건너편에 있는 파라오 모텔의 문 옆에 서있었다. 키가 무척 커서, 그녀 옆의 초라한 스핑크스가 그 기세에 눌려 더욱 궁상맞아 보였다.
큰 키에도 불구하고 새빨간 킬 힐을 신고 있었으며 살빛이 드러나는 검은 스타킹에 쫙 달라붙는 모직 미니스커트가 여자의 육감적인 몸매를 부각시켰다. 위에는 호피무늬의 숄을 두르고 있었는데 상체가 하체에 비해 너무 부해보여서 위태롭게 서있는 역삼각형 같았다. 오징어 먹물로 염색했을 것 같은 길고 새카만 머리는 굵은 롤로 힘차게 말아놓아 건드려도 움직이지 않을 만큼 단단해보였다. 이토록 세찬 비가 하루 종일 내리는 날, 저렇게 풍성하고 굵은 컬이 진 파마머리가 몇 시간이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게 신기했다.
새빨간 립스틱과 진한 눈 화장도 그녀의 인상에 한몫했다. 가까이서 보지 않아도 인조속눈썹이란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속눈썹이 길었고, 숯으로 칠한 것 같은 눈썹과 경극을 연상시키는 창백한 피부는 강렬하게 대비됐다.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기다란 손톱엔 새빨간 매니큐어가 빈틈없이 발라져있었다. 난 접대하는 여자가 있는 술집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술집에 다니는 여자일 거라고 단정 지었다. 저렇게 생긴 사람이 술집이 아닌 다른 곳을 다닌다는 게 상상이 안됐다.
여자의 맞은편엔 남자가 있었다. 우산을 쓰고 있는 여자가 한 손으론 핸드백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론 머리칼을 빙빙 꼬고 있었기에 우산을 들 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남자가 있다는-있어야만 한다는-사실을 알아차렸다. 여자 주위를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절대 볼 수 없을 정도로 남자는 키가 무척 작았다. 통이 큰 청바지와 구질구질하고 이상한 스타일의 연회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알이 커다란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지적이기는커녕 더욱 멍청해보였다. 얼핏 보면 사람이라기 보단 한 마리의 쥐 같기도 했다. 버버리 무늬의 2단 우산을 자신의 키보다 높게 들고 여자를 씌어주고 있는 모습이 너무 부질없어 보여 안타까웠다.
여자는 끊임없이 말을 했다. 화를 냈다. 짜증을 내고, 소리를 질렀다. 기다란 손톱이 달린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깊은 한숨을 내쉬다가도 갑자기 악을 내지르며 핸드백으로 남자의 머리를 때렸다. 그러다가 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자신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그러면 그럴수록 검은색 머리의 굵은 컬은 더욱 풍성해졌고 포효하는 어미 사자의 느낌까지 풍겼다. 그녀는 인간이 혼자 있을 때 내는 감정과 소리들의 총집합 같았다. 남자는 우산을 씌어주기 위해 마련된 벽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행인들은 솔직하지만 시끄러운 감정과 답답하지만 조용한 벽의 긴 퍼포먼스를 힐끗힐끗 보며 지나칠 뿐, 말리지 않았다. 아니, 사실 말릴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서로 죽도록 싸우거나, 죽도록 때리거나, 죽도록 죽이는 게 아니었다. 그냥, 조금 시끄럽고 조금 무서울 뿐이었다.
비바람이 부는 밖과 달리 내가 있는 편의점은 따뜻했고 빗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아 아늑했다. 히터가 돌아가는 기계음은 낮게 흐르다가 언제부턴가 정적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외부의 사건을 관망하는 것은 평화로웠다. 난 뒷짐을 지고 그 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자세히 보니 남자도 뭔가 변명을 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작은 입술로 끊임없이 웅얼대는 게 보였다. 하지만 여자는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높은 주파수의 삑삑거리는 소리가 유리창으로 전달되어왔다. 빗소리와는 섞일 수 없는 다른 성질의 음성이었다. 언제 그만 둘까.
지치지 않는 여자의 흥분과 남자의 인내에 난 서서히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는 싸움 끝엔 무엇이 있을지 보게 될 것 같아 무서웠다. 어서 그만했으면, 어서 화해했으면. 난 유리창에서 코를 떼며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눈을 뜨면 생길 기적을 바라며 눈도 감아보았다. 종교는 없었지만 난 항상 누군가에게 기도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부처님도 아닌 나만의 그 무엇에게. 저들이 화해하게 해주세요, 그만 싸우게 해주세요. 깍지 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내 기도가 이루어진 것처럼 여자의 목소리도 뚝 끊겼다. 한 번도 이루어진 적 없던 기도가 이런데서 실현되다니. 난 살짝 씁쓸해하며 다시 유리창에 코를 박았다. 여자도, 남자도 보이지 않았다. 접히지 않은 2단 버버리 우산만 덩그러니 놓여 내리는 비를 향해 입을 벌릴 뿐이었다. 그 때 딸랑, 이며 유리문이 열렸다. 난 깜짝 놀라 기겁을 하며 자세를 곧추세웠다. 검은 파마머리에 호피무늬 숄을 두른 그녀, 그녀였다.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를 내며 당차게 들어온 그녀는 편의점을 비잉 둘러보았다. 그 사이 키가 작은 남자도 허겁지겁 여자를 따라 들어왔다. 그의 외투 끝자락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간헐적으로 바닥을 적셨다. 문에 달린 청동 방울은 맥없이 흔들렸다. 가까이서 본 남자의 행색은 더욱 형편없었다. 낮은 콧등으로 자꾸만 안경이 흘러내려왔고, 빗물에 젖은 긴 바짓단을 질질 끌고 다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연회색 외투에 떨어져있던 빗방울은 순식간에 스며들어 진한 쥐색 무늬를 만들어냈다. 저렇게 여자를 졸졸 따라다니다간 점점 새카매져 어느 순간 까만 점으로 소실될 것만 같았다.
여자는 다시 한 번 편의점을 살펴보더니 내게 물었다.
-여기 도루코칼 어디 있어요?
역시나 높은 주파수의 목소리였다. 눈앞의 와인 잔을 한번쯤은 깨먹어 봤을 법한, 째지고 듣기 싫은 음성이 귀를 후벼 팠다. 난 살짝 눈을 찡그리며 다시 물었다.
-도루코칼이라뇨?
-그, 면도칼이요.
면도칼이라니, 대관절 이 대낮에 면도칼을 찾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난 혀로 입술을 축였다. 계산대에서 나와 면도기가 있는 매대로 다가갔다.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면도기가 한 줄로 나란히 매달려 있었다. 매일같이 이곳을 청소했지만 여자가 원하는 면도칼이 어떤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 옆에 선 여자에게서 강한 향수냄새가 풍겼다. 파우더 향이 너무나 강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면도기 종류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곤 되물었다.
-면도칼이요?
-네, 없어요?
신경질적인 물음이었다. 여자는 정수리에서부터 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나를 훑었다. 키가 너무 커서 그런지 날 쳐다보는 눈빛이 깔보는 것 같았다. 뭔가 아니꼬운 표정이었다.
-그런 건 없는 것 같은데…….
실제로 난 면도칼을 본적이 없었다. 면도기와 면도거품은 봤지만 면도칼이라니. 그건 어떻게 생긴 칼인지, 면도기와는 어떤 점에서 다른지 알 수가 없었다. 면도기에서 칼날만 빼낸 게 면도칼인가 싶기도 했다.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들이 머리를 가득 메웠지만 확실한 건 여자가 찾는 게 ‘면도’칼이 아닌, 면도‘칼’이란 점이었다. 난 그 사실을 알면서도 면도기 주변에서만 서성였다.
-여기 커터 칼 있네.
여자는 계산대 맞은편에서 용케도 문구코너를 찾아내 커터 칼을 집었다. 파란색 몸통에 검은색 휠이 빛나는 문구용 칼이었다. 마치 내가 칼이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숨긴 것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정확히 그런 건 아니었지만, 여자가 칼을 찾아낸 게 달갑지만은 않았다.
-저기, 그거 가지고 뭐하시게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해서 칼을 그냥 팔 수 없었다. 나보다 앞서 계산대로 가고 있던 그녀는 내 물음에 휙 뒤돌아보았다. 숄이 펄럭이며 호피무늬가 더욱 현란해졌다. 위협적이었고 강해보였다. 번진 마스카라가 눈 주위를 메꾸고 있는 모습이 지저분하기는커녕 또 하나의 화장술 같았다. 그렇게 그녀에겐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비싸고 기품 있는 매력은 아니었지만 싸고 천박한 괴력도 아니었다. 술집여자, 라고 부르기엔 그 단어가 너무 가볍다고 생각됐다.
-실밥요, 실밥 자르려고요!
여자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전의 아니꼬운 표정은 싹 사라지고 희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자갈 굴러가는 소리를 내며 웃는 모습이 아까의 여자와는 전혀 다른 새 사람 같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의 미니스커트의 밑단에 꼬리처럼 대롱대롱 매달린 기다란 실밥을 직접 보여주기까지 했다. 난 할 말이 없었다. 실밥을 자르려 하는 여성에게 커터 칼을 팔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마음은 무겁고 손발은 떨렸다. 바코드를 찍으면서도, 멤버십카드가 있냐는 질문을 하면서도, 부질없는 고민을 했다. 정말 그건 부질없는 고민이었다.
여자는 핸드백에서 펠트로 된 작은 동전 지갑을 꺼냈다. 지갑이라기 보단 귀가 큰 회색 코끼리가 앙증맞게 붙어있는 하늘색 주머니 같았다. 각 잡힌 명품 장지갑이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그녀는 동전지갑을 계산대 위에 거꾸로 엎었다. 천 원짜리 한 장과 오십 원, 백 원짜리들이 조금 쏟아졌다. 세어보니 백 원이 부족했다. 여자는 그때까지 출입문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있던 남자를 향해 사납게 소리쳤다.
-야, 백 원 있냐?
남자는 입술을 깨물며 한참을 망설이더니 결국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입으로는 끊임없이 무어라고 옹알댔다. 주머니 속에서 한참을 오물조물거리던 작은 손이 백 원짜리 동전을 꺼내는 게 보였다. 그는 계산대를 향해 걸어오다 잠시 멈춰 서서 여자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 온갖 종류의 감정이 서려있었다. 너무나 온갖 종류라 하나하나 건져 올릴 수 없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는 계산대 끄트머리에 백 원을 조심히 올려놓았고, 난 동전을 집어 포스기에 넣었다. 어찌나 손으로 만지작거렸는지 동전이 땀으로 미끈거렸다.
‘화신 소형 커터 칼’이라는 화면의 문구가 유난히 또렷이 보였다. 여자는 포장을 뜯은 커터 칼을 손에 꼭 쥔 채 남자를 지나쳐 재빨리 편의점을 나갔다. 남자는 뒤따라 나가며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미옥아, 미현아, 미연아, 셋 중 하나였다. 평범한 이름이었지만 전혀 평범하게 들리지 않았다. 안녕히 가세요, 라는 내 부질없는 중얼거림이 격하게 흔들리는 유리문에 부딪혀 찌그러졌다. 한차례 폭풍이 몰아치고 나간 듯 편의점 안엔 절망만이 가득했다. 나의 절망이었는지, 여자 혹은 남자의 절망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난 다시 유리창에 코를 박고 편의점을 나간 여자의 뒷모습을 쫓았다. 그녀는 빗속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똑바로 걸었다. 새빨갛고 높은 힐이 완벽하게 중심을 잡으며 그녀의 종아리를 받쳐주는 것 같았다. 당차게 걸어 도착한 곳은 파라오 모텔 입구였다. 한 건물에 있는 바와 찜질방의 입구는 각각 따로 있었으니 그녀는 모텔로 간 게 틀림없었다. 입구를 지키는 볼품없는 스핑크스가 여자의 뒷모습을 힐끗 돌아보는 것 같았다.
여자를 뒤따라간 남자는 긴 바짓단을 질질 끌며 우산을 향해 달렸다. 활짝 펴진 채 빗물을 받고 있는 2단 버버리 우산을 집은 그는 그것을 탈탈 털더니 야무지게 묶어 품에 꼭 안았다. 그리곤 여자를 따라 모텔 입구로 들어갔다. 그 입구가 마치 출구가 없는 동굴 같아서, 삼키기만 할 뿐 뱉어내진 않는 블랙홀 같아서 두려웠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 한 쌍의 남녀, 커터 칼을 손에 쥔 여자와 2단 버버리 우산을 품에 안은 남자라니. 다시 유리창에 코를 박은 나는 쿵쾅대는 가슴을 짓누르며 그들이 나오길 기다렸다.
손님은 얼마 없었다. 일회용 우산 2개를 팔고, 스팸과 햇반, 우유, 콘푸로스트를 잔뜩 산 외국인 한명을 상대했다. 매번 똑같은 시간에, ‘에휴, 이제 또 한 끼를 먹어야제.’라고 중얼거리며 신라면과 천 원짜리 두 장을 내미시는 할아버지도 왔다 가셨다. 계산을 해주면서도, 거스름돈을 내주면서도, 봉지에 물건을 담아주면서도 내 관심은 오직 파라오 모텔 검은 입구에 머물러 있었다. 다른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그래, 실밥 따위를 제거하려고 커터 칼을 산 게 아니야. 그렇게 울고불고 화를 내다가 왜 갑자기 치마의 실밥이 신경 쓰여? 온갖 질문들이 머리와 가슴을 관통했다. 그렇다 해도 내가 안 팔 수는 없었잖아. 나는 한낱 알바생인걸. 저 여자가 커터칼로 실밥을 자르든, 뭘 자르든 내가 무슨 상관이야. 온갖 대답들도 함께 쏟아졌다.
지하철역의 편의점이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곳은 벽에 유리창이 거의 없어 편의점 밖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도 공간도 없었다. 너무 좁아 커터 칼 같은 건 구비해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퉁이에 위치에서 두 면이 전면 유리인, 넓은데다가 커터 칼까지 빠짐없이 갖춘 이 편의점이 싫어졌다. 쏟아지는 비가 얄미웠고 잠시 잊고 있던 무릎이 다시 시렸다. 앞으로 비가 올 땐 스타킹을 신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비는 사람을 미치게 했다. 그래서 그토록 멀쩡한 그녀도,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화를 내고 화를 내다가 문득 실밥이 보였고 이 실밥을 제거해야겠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힌 것이다. 난 내 시급을 짊어진 채 느리게 흘러가는 시계의 분침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모든 게 비 때문이야, 라고.
다시 등 뒤 유리창에 코를 박았다. 코끝에 닿는 유리의 감촉이 서늘했다. 파라오 모텔 입구를 지키는 비에 젖은 스핑크스는 늠름하기보단 약간 의기소침해보였다. 이마 뒤로 머리를 깨끗이 넘긴 모습이 껄렁대는 불량배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검은 입을 벌린 파라오 모텔과 그 앞을 지키는 짝퉁 스핑크스라니. 스핑크스는 그 문을 통과하려는 자들에게 수수께끼를 냈을 것이다. 아침에는 네 다리로, 낮에는 두 다리로, 밤에는 세 다리로 걷는 짐승이 무엇이냐. 여자와 남자는 옳은 답을 말했을까. 그건 사람이요, 라고. 커터 칼을 쥔 여자와 2단 버버리 우산을 안은 남자는 얼마나 지혜로운 인간들이었을까. 멍청해 보이는 스핑크스의 두 눈을 바라보며 난 중얼거렸다. 부디 모두 무사하기를.
잠시 후 모텔 입구에서 남자가 나왔다. 2단 버버리 우산을 품에 꼭 안은 그는 주위를 살펴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모텔 앞을 서성거리기도 하고, 일차선 도로를 세로로 혹은 가로로 왔다 갔다 하기도 했다. 묶었던 우산을 다시 풀더니 팟, 하고 펴보기도 하고, 다시 예쁘게 촵, 하고 접어 묶기도 했다. 여자는 어디로 간 걸까. 커터 칼을 손에 쥐고 있던 여자는 어디로 가고 2단 버버리 우산을 품에 안은 남자만이 동굴에서 나온 걸까.
난 유리창에 콧구멍 모양의 뿌연 김을 만들어가며 남자가 하는 모양새를 살폈다. 그는 계속 그런 식이었다. 왔다갔다, 서성서성, 우산을 팟, 우산을 촵, 다시 왔다갔다, 서성서성, 우산을 팟, 우산을 촵. 그러다가,
그가 오토바이에 치였다.
일차선 도로를 가로지르며 서성거리던 그가 우산을 팟, 하고 펼친 순간, 장안성이라는 빨간 깃발을 단 오토바이가 그를 덮쳤다. 그는 우산과 함께 허공으로 솟아오르더니, 다시 우산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다만 우산은 조금 더 천천히, 우아하게 떨어졌지만 그의 몸은 눈 깜빡할 사이에 바닥에 내쳐졌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비명을 지르고, 쓰러진 남자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오토바이를 몰던 운전자는 침착하게 헬멧을 벗고 119에 신고하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앰뷸런스가 굉음을 내며 현장에 도착했고 쓰러진 그가 차에 실려 갔다. 오토바이 운전자도 함께 타고 간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제각기 할일을 찾아 떠났다. 현장엔 빗물에 대부분 쓸려가고 얼마 남지 않은 그의 혈흔이 조금 묻어있었고, 팟, 하고 펼쳐진 채, 촵, 하고 접히진 못하고 있는 2단 버버리 우산만이 거꾸로 뒤집혀서 뒹굴고 있었다.
난 이 상황을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일어난 모든 일들이 한데 엉겨 꼬이고 있었다. 미니스커트에 대롱대롱 매달린 실밥과 커터 칼, 칼 값에 백 원을 보탠 남자, 2단 버버리 우산, 파라오 모텔, 모텔에서 나오지 않는 여자. 그리고 결정적으로, 방금 오토바이에 치여 앰뷸런스에 실려 간 남자. 대체 진실이 무엇인지, 진실이 영원히 밝혀지긴 할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데, 상관이 없을 수 있는 일인데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내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가 편의점의 정적과 평화를 깨는 것 같았다. 스핑크스는 여전히 그 멍청한 눈으로 허공을 주시할 뿐이었다. 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이.
비는 쉬지 않고 주룩주룩 계속해서 내렸다. 1분은 뭐고, 1시간이 무엇이며, 하루는 또 어떤 개념이냐는 듯, 시간 감각 없이 연속적으로 퍼부을 뿐이었다. 바람에 섞여 비바람이 된 비는 더 이상 비와 바람을 구분할 수 없게끔 휘몰아쳤다. 사람들은 자신과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극을 전혀 모른 채 과자와 육포, 맥주와 소주를 계산했고 오늘 밤의 파티에 관해 떠들었다.
밤이 가까워졌고, 이는 곧 내 퇴근시간이 다가옴을 의미했다. 파라오 모텔의 검은 입구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아무도 들이지 않았고, 아무도 뱉어내지 않았다. 난 여전히 시린 무릎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그 입구를 바라봤다. 묵묵부답이었다. 도로엔 더 이상 남자의 핏자국이 남아있지 않았고, 그 어떤 사고나 비극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2단 버버리 우산도 거센 바람에 날아가 그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가 걸어서 갈 수 있는 어떤 현실 안으로 날아갔을까. 아님, 저 멀리, 짝퉁이 아닌 진짜 스핑크스가 늠름한 위엄을 자랑하는 이집트로 향하는 해류에 휩쓸린 건 아닐까. 그럼 그 우산은, 남자가 야무지게 묶어 품에 꼭 안던 2단 버버리 우산은 우리의 현실인가. 더 이상 우산이 아닌, 뜨거운 햇빛을 가리는 양산으로 쓰이게 된다 해도?
난 갑자기 현실이 현실 같지가 않아 영수증 목록을 확인해보았다. 4시 28분, 분명히 1500원짜리 ‘화신 소형 커터 칼’을 현금으로 결제한 기록이 있었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이구나, 현실이구나, 꿈이 아니구나 싶어, 다시 두려워졌다. 파는 게 아니었어, 파는 게 아니었어. 어째서 남자가 나온 것인가, 아니, 어째서 남자만 다친 것인가. 머리는 아파왔고 손엔 땀이 가득 찼다. 숫자에도, 바코드에도, 어느 것 하나에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다. 난 이토록 어이없이 내게 닥친 비극이 혐오스러웠다. 이렇게 오늘은 갈 것이다. 그렇담 오늘의 기억 또한 가는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오늘의 기억은 오늘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이 비극의 속성이고 비극이 비극이 될 수 있는 이유였다. 그녀에게 커터 칼을 판 오늘은 평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영수증 목록에도 새겨져 있듯이 나를 둘러싼 모든 기억엔 오늘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난 퇴근이 두려웠다. 이렇게 오늘 하루가 끝나버릴까 두려워 파라오 모텔 입구와 시계를 번갈아 확인했다. 다시 깍지를 끼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누구에게 할까 하다가 멍청히 비를 맞고 서있는 스핑크스를 바라봤다. 인간의 머리와 사자의 몸을 가진 그 조각상은 진실을 알 것 같은 유일한 인간이자 동물인 사물이었다. 기적을 바랬다. 시간이 이렇게 멈춰버리거나, 커터 칼을 쥔 여자가 멀쩡히 저벅저벅 걸어 나오거나. 진실 따윈 몰라도 되니 적당한 현실을 찾고 싶었다. 이게 인간의 한계였다.
기적은 없었다. 10시가 되자마자 난 쫓기듯 가게를 나와야했다. 가방끈을 부여잡고 모텔 앞을 지나치는 순간 누군가 검은 동굴로부터 또각또각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새빨간 구두가 먼저 보였고, 부한 호피무늬 숄이 다음으로 보였다. 마늘과 쑥만 먹다 백 일만에 동굴 밖으로 나온 곰처럼, 그녀는 우람해보였다. 난 모텔 입구 앞에 서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사고 회로가 멈춰서 걸음조차 뗄 수가 없었으니까.
여자의 손엔 커터 칼이 그 모습 그대로 쥐어져있었다. 파란 몸통에 붙은 검은색 휠이 네온사인에 반사되어 더욱 빛나보였다. 그녀가 날 봤다. 내 얼굴을 한눈에 알아보는 눈치였다. 여자는 씨익 웃으며 내게 말했다.
-실밥, 잘랐어요.
그 한 마디를 던지고 유유히 반대쪽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가느다란 사람 다리 위에 얹힌 거대한 표범 한마리가 위태위태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미니스커트 자락 아래로 기다란 실밥이 꼬리마냥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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