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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사’라는 말이 여론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허대석 교수 연구팀은 23일 안락사·의사조력자살·연명의료결정에 대한 국민 인식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용어 혼란이 실제 여론 형성에 교란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성누가병원 김수정 박사가 제1저자로 참여했으며 대한의학회지(JKMS) 11월호에 게재될 예정이다. 연구 제목은 ‘Confusion in Terminology Related to End-of-Life Decisions: Euthanasia, Physician-Assisted Suicide and Decisions on Life-Sustaining Treatment’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용어 혼란이 의사조력자살 여론에 미치는 영향’을 실증적으로 분석했다.
연구팀은 전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안락사·의사조력자살·연명의료결정’ 관련 시나리오를 제시하며 설문을 진행했다.
그 결과 ‘의사조력자살’에 대한 찬성률은 용어만 제시했을 때 72.1%였으나 구체적 시나리오를 설명한 뒤에는 47.0%로 급감했다. 반면 ‘연명의료결정’ 찬성률은 75.5%에서 81.0%로 오히려 증가했다.
특히 ‘존엄사’라는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여론 방향이 달라졌다.
‘존엄사 찬성군’에서는 의사조력자살 지지가 63.8%에서 58.0%로 감소한 반면, ‘존엄사 반대군’에서는 6.5%에서 18.6%로 오히려 상승했다.
허 교수는 “이는 ‘존엄사’ 용어가 여론조사에서 의사조력자살 찬성률을 과대 추정하게 만드는 대표적 교란 요인(confounding factor)”이라고 설명했다.
국민이 실제로 말기 상황에서 가장 선호하는 선택은 ‘연명의료결정(41.3%)’으로 나타났다. ‘안락사(35.5%)’, ‘의사조력자살(15.4%)’보다 월등히 높은 비율이다.
또 전체 응답자의 85.9%가 ‘연명의료결정’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안락사(37.4%)’, ‘의사조력자살(53.8%)’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허대석 교수는 “국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고통 없는 자연스러운 임종’이지 생명을 의도적으로 단축하는 행위가 아니다”라며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이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적용 대상을 확대하고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김수정 박사 역시 “용어 혼란은 여론조사 결과를 왜곡할 뿐 아니라, 국민 의사에 반하는 정책이 만들어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연구팀은 이번 결과가 의료계뿐 아니라 입법과 정책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고 지적했다.
특히 최근 논의되고 있는 ‘조력존엄사법’ 같은 표현은 국민이 ‘연명의료결정’을 ‘의사조력자살’로 혼동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조사에서 국민의 절반 이상(57.2%)이 ‘존엄사’를 ‘연명의료결정’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연구진은 “여론조사나 입법 과정에서는 반드시 시나리오 기반 설명이 전제되어야 하며, 단순한 용어 제시는 해석의 차이에 따라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연구가 “국민 여론의 진짜 민낯을 드러냈다”고 평가한다. 연명의료결정법이 말기환자 중심으로만 제한된 현재 구조에서는 국민이 원하는 ‘자연스러운 임종 선택권’을 충분히 보장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보건복지부는 2018년부터 시행 중인 연명의료결정법의 적용 범위를 단계적으로 검토 중이다.
이번 서울대 연구 결과는 향후 국회에서 논의될 조력존엄사법(가칭)과 연명의료결정법 개정안 논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특별취재팀 news@koreanursing.or.kr